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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어느 늙은 노동자의 강남 스타일 / 박진

등록 2019-07-15 17:50수정 2019-07-16 09:25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사진 속 남성은 삭정이처럼 버석하게 말라 툭 부러질 것도 같고 부스럭하고 부서질 것도 같다. 지난달 10일부터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빌딩 앞 폐회로텔레비전(CCTV) 철탑에 올랐으니 오늘(15일)로 고공농성 36일차다. 단식 상태로 올랐기 때문에 곡기 끊은 지 43일째다. 의료진에 따르면 팔과 다리에 있던 근육은 이미 다 빠져 버렸다. 그곳은 한 사람이 발 뻗고 누울 수도 없는 좁은 곳이라 어느 때는 발이 밖으로 쑥 삐져나온 것도 볼 수 있다. 그가 오른 곳은 서울 도심을 향하거나 빠져나가는 차들이 하루에도 수만대쯤 흐르는 강남역 차도 중간에 있다.

외국 나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럼 강남 살아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만다. 강의 남쪽인 경기도 도시에 살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우리는 대체로 강의 남쪽이나 강의 북쪽 또는 서쪽과 동쪽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함께 미소 지으며 ‘강남 스타일’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 망고 하나를 더 넣어주며 “아이 러브 강남, 아이 노 강남”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강남에 산다는 것’의 정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강남에 진입하기 위한 한국 사회의 욕망을 말해준들 알까. 만약 이방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저이의 강남살이를 도대체 어디부터 들려줘야 할까. 그가 하늘에 오르기 전까지 신줏단지처럼 끌고 다니던 낡은 007가방에 대해, 또는 거기서 쏟아진 거짓말 같은 진실에 대해, 우리가 알면서도 모른 척 내버려둔 어떤 일등 신화 뒤에 숨은 비참함에 대해, 무엇부터 말해줘야 할까.

남성은 지난 10일 그곳에서 60살을 맞았다. 정년이었다. 1959년에 태어나 23살에 삼성항공에 입사했다. 삼성시계로 전보발령 되자 노사협의회 활동을 했고 노조 설립을 시도했다. 그때부터 불행은 시작됐다. 회사는 성추행 혐의를 씌워 그를 해고했다. 조작된 것이었다. 후에 여사원이 조작 사실을 진술하고 인증서를 작성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회사 상사의 부인의 연락을 받고 나간 그의 아내는 같이 경찰차를 타고 가다가, 경찰에 의해 성폭행 당할 뻔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해고 소송 중 회사는 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계열사 근무 후 원직 복직을 약속하며, 삼성물산 러시아 스몰렌스키 건설 현장으로 발령을 냈다. 그곳에서 회사는 다시 ‘노조포기 각서’를 내밀었다. 말을 듣지 않자 감금당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가방에서 복직 합의서를 빼앗아갔고, ‘간첩’으로 대사관에 고발하기도 했다. 조사를 다 받고서야 무혐의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끝내 복직은 하지 못했다. 그의 경력은 그렇게 삼성물산에서 끝났다. 회사 바깥으로 쫓겨나서도 악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단식한 날을 합치면 200일이 넘고, 농성한 날을 합치면 수천일이 넘는다. 그의 지독한 인생사다. 회사가 빼앗기 위해 부수었다던 007가방에서 묵은 서류들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이야기들이다.

그곳에 오르기 전 꼬장꼬장하고 완고한 그는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과대망상쯤으로 여겨진 사실들은 회복 불가능한 시간과 함께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절박한 굶주림의 날들이 오래되고서야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 푸는 것에 반대한다. 다음 사람이 더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들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 한다. 현재 그의 근육만 손실된 것이 아니다. 가끔 혼미하게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른쪽이 마비되어 저혈당 쇼크와 뇌손상이 우려되는 상황이 됐다. 살아남아야 한다. 진짜 죽기로 마음먹고 내려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년을 지나 다닐 수 있는 회사조차 없게 된 그가, 책임을 물을 회사의 주소조차 찾을 수 없는 그가, 자신의 삶과 가족의 생애가 송두리째 파괴됐는데 어디 한군데 책임 물을 곳이 없는 그가, 더 이상 쫓겨나고 내몰릴 곳도 없는 그가 살지 못한다면 괜찮은가? 어쩔 수 없는 죽음이겠는가? 그러니 삼성의 누군가에게 간절한 요구를 한다. 그는 지금 법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인생의 마지막 자존을 털어 존엄을 회복시켜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 말을 들어달라. 만나달라. 살려달라. 그 노동자의 이름은 김용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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