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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상산고 사태’로 제기해본 엉뚱한 질문들

등록 2019-07-03 18:52수정 2019-07-04 09:29

김종구
편집인

나는 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고교 평준화 조처 이전에 그 지역에서는 명문고로 불리던 학교였다. 서울 등 5대 도시와 달리 5년간 평준화 조처가 유예되면서 한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자율형사립고 재지정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상산고가 있는 지역의 학교다.

요즘 ‘상산고 사태’를 지켜보면서 엉뚱한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지금까지 시험을 통해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는데, 지방교육청이 평준화 결정을 내렸다면 어떤 현상이 빚어졌을까. 고등학교 동문 선후배를 비롯해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할 것은 불문가지다. “왜 우리 고장의 자부심을 없애려 하는가” “인재 육성의 산실을 없애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다”…. 상산고 자사고 취소 반대에 동원된 논리들이 똑같이, 아니 더 격렬하게 등장했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지역 명문고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숱한 다른 학생들의 열패감과 좌절감의 상처를 상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 명문고 출신들의 심리 속에 은연중 깃들기 마련인 우월감과 선민의식은 더불어 사는 사회, 지역과 국가의 건강한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나 자신 누구보다 모교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지만, 감정을 떠나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평준화 찬성이 결국 정답이 될 수밖에 없다.

‘인재 양성의 산실’이라는 말도 한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중학교 무시험 조처가 시행되면서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던 그 지역 최고 명문 중학교가 없어졌다. 그 중학교에 갔어야 할 우수 학생들은 다른 곳곳의 중학교에 흩어져 진학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재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별 차이도 없었다. 또 다른 지표도 있다. 언론인을 ‘인재’라고 하면 코웃음 칠 분들도 많겠지만 어쨌든 내 고향 출신 언론인의 수를 살펴보니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평준화 이후 매년 배출되는 고향의 여러 고등학교 출신 기자의 ‘총량’은 예전보다 오히려 더 늘어났다. 내 모교 출신 언론인들의 모임도 결국 고향 전체 고등학교 출신 언론인 모임으로 확대 개편됐는데, 훨씬 풍성하고 의미 있는 조직이 됐다.

예전의 지방 명문고 문제는 사실 지금 자사고가 안고 있는 문제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 수 있다. 상산고를 비롯한 상당수 자사고가 ‘의대 입시 사관학교’로 전락한 현실이 이를 웅변한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 이를 통한 다방면의 인재 배출이라는 애초의 목적이 실종된 자사고의 존재 의의가 있을까. 자사고들이 ‘미래인재 양성’을 진정한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면 높은 의대 진학률을 자랑거리로 삼을 게 아니라 부끄럽게 여겨야 옳다.

이른바 명문학교의 큰 장점은 훌륭한 선후배, 동급생들과의 만남이고, 이를 통해 더욱 나은 인간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내 모교에 갖는 가장 큰 자부심은 높은 명문대 진학률이 아니라 1972년 유신이 선포됐을 때 선배들이 고등학교로는 유일하게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시도한 것이다. 그 사건으로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둔 선배 여러 명이 퇴학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전체 수석으로 고등학교에 들어온 내 동기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민주화운동으로 제적을 당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 동기생들에게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끼치며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더욱 고민하게 만들었다. 극단적 예를 들었지만 이런 바람직한 ‘동료 효과’는 매우 값진 것이다.

그런데 상산고를 비롯한 자사고들은 이런 점에서도 거꾸로 가고 있다. 이들 학교가 진정한 명문고라면, 애초 의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들어온 학생들도 주변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다른 쪽으로 진로를 바꾸는 경우가 많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의대 진학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었다. (…) 교내 시험 결과를 보면서 스스로 서열화하고 경쟁의식을 느끼고 패배감이 들었다”는 한 상산고 졸업생의 고백은, 이 학교의 ‘동료 효과’가 시대적 바람과는 거꾸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본다. 만약 공립학교인 내 모교에 다시 학생선발권을 부여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자사고에 부여한 우수학생 선발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이에 따른 교육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가 더욱 선명히 다가온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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