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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한국 외교가 빛나던 시절 / 백기철

등록 2019-06-20 18:10수정 2019-06-20 19:51

백기철
논설위원

미-중 무역전쟁이 고조되면서 이른바 ‘냉전 2.0’ 시대가 본격화하는 조짐이다. 냉전 종식 이후 30여년을 허송세월해온 우리로선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자칫 한반도 평화의 큰 흐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30년을 돌아보면 한국 외교가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후 노태우 대통령이 추진했던 북방외교, 그리고 북핵 위기로 출렁였던 1990년대 후반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그것이다. 둘 다 외교 역량을 극대화해 지정학적 창을 열어젖힌 경우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18일 평양 시내를 카퍼레이드 하며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18일 평양 시내를 카퍼레이드 하며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태우는 스스로 외교를 잘 모른다고 생각해 참모들에게 일임한 결과 오히려 성과를 냈다. 이 또한 지도자의 덕목이다. 이 시절 중·소와 수교했고, 역사적인 남북합의서가 채택됐다. 특기할 점은 남북연합을 명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1989년 당시 여야 4당 합의로 마련됐다는 점이다.

디제이 시절은 한국 외교의 황금기였다. 최초의 노벨평화상, 남북정상회담이 상징하듯 디제이는 출중한 외교 역량으로 북한 문제에서 주도권을 상당 부분 행사했고, 한-일 간에도 해방 이후를 결산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처럼 강대국을 주변에 둔 지정학에선 외교 역량의 극대화가 너무도 중요하다. 그간 ‘외교 대통령’이라 할 만한 이가 많지 않은 건 국가적으론 불운이다. 정치도, 언론도, 국민도 성숙한 외교의 밑거름이다. 제 눈에 안경 식으로, 이념의 잣대로, 진영 논리로 외교를 재단해선 안 된다.

지난 2년간 한-미 동맹이 붕괴 직전이라는 주장은 대표적인 침소봉대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 대북정책 이견 등을 거론하는데, 붕괴의 근거로 보기 어렵다. 한-미가 어렵사리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전시작전권 전환, 평화조약 등이 현실화하면 한-미 동맹은 조정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동맹은 와해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코리아 패싱’이란 말도 그렇다. 트럼프가 일본에 올 때마다 한국에도 와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한·일의 차이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일본은 1890년대 이미 서구식 의회를 도입했다. 1905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서구에 맞선 아시아의 첫 승리로 많은 나라들에 기억됐다. 일본은 외교, 경제, 군사 등에서 아직 많이 앞서 있다. 기죽거나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겸허히 우리 위치를 파악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외국 나가는 걸 뭐라 하는 건 답답하다. 경제가 어렵고, 외교가 안 풀릴수록 더 자주 외국 나가서 길을 뚫어야 한다. 국정 경험이 있는 정당이 외국 가는 대통령더러 “천렵질” 운운하는 건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미-중 대결이 격화하는 건 우리에겐 분명 도전이다. 이런 때일수록 국가적 역량을 모아야 한다.

첫째, 미-중 가운데 양자택일식 논리는 경계해야 한다. 둘 중 어디를 택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둘 중 한쪽을 택하지 않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니 승자 편에 서자는 논리는 현실적인 부분이 있지만 대놓고 내세울 건 없다. 중국과 잘 지내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다만, 대외정책의 기조가 한-미 동맹에 기반한다는 걸 내부적으론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반미면 어떠냐”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도 결코 한-미 동맹을 가벼이 보지 않았다.

둘째, 세계 10위권의 ‘강중국’답게 원칙과 기준에 따라 강대국 외교를 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미-중 사이에서 원칙에 따라 대처함으로써 활동공간을 유지해온 대표적인 나라다. 양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선 상대가 강대국이라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셋째, 외교의 국내적 합의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민감한 때일수록 내부 기반을 다져야 효율적 외교를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정권교체를 경험한 나라답게 외교에서는 여야 모두 성숙해져야 한다.

넷째,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연말까지 무언가 확고한 이정표를 세우고 싶은 게 집권 쪽의 속사정일 것이다. 그렇다고 서두를 일은 아니다. 지금의 한반도 평화 흐름을 다시는 되돌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가야 한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찾아온 지금의 기회가 한국 외교의 또다른 ‘빛나는 시절’이 될 수 있도록 뚜벅뚜벅 가야 한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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