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0여년 동안 대략 20년마다 나타나 3~6년씩 지속했던 ‘시대의 담론기’를 8회(한 회는 북한)에 걸쳐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이들 시기를 총괄하고 조만간 시작될 새 담론기를 전망해본다.
■ 18세기 후반 개화기가 시작된 이래 한반도(한국전쟁 이후는 남한)에서 진행된 시대의 담론기는 다음과 같다.
각 시기는 그때 만들어진 틀이 적어도 이후 10~20년 동안 유지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비슷한 중요성을 갖는다. ①1880~85년(‘개화’라는 과제) ②1894~98년(개혁과 왕국의 진로) ③1919~25년(독립 민주공화국의 꿈) ④1945~48년(분단·분열·전쟁) ⑤1960~65년(군사주의와 산업화) ⑥1987~91년(민주화의 성취와 한계) ⑦2003~07년(민주화 이후 대전환과 복지국가)
시대의 담론기가 생기는 이유는 역사·사회·경제·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제들이 특정 시기에 한꺼번에 제기되기 때문이다. 근현대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갖는 이 과제들은 각 담론기를 고비로 삼아 고유한 성격을 드러내고 발전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과제는 크게 넷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생산력의 지속·발전, 평화·공존공영의 대외관계, 다수 국민이 참여하는 활력 있는 체제 구축이 그것이다. 열쇳말로 표현하면 민주주의, 생산력(경제·근대화), 대외관계, 체제가 된다.
■ 체제 영역에서 우리나라는 길지 않은 시간에 아주 다양한 경험을 했다.
왕국, 제국, 식민지, 외국의 군정, 민간 독재, 군사 독재, 민주공화국이 잇따라 등장했다. 근대 이후 지구촌에 나타난 거의 모든 정치체제에 대한 실험이 한반도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담론기에 새로운 체제가 대응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체제 문제가 각 담론기의 종합판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체제에 대한 여러 경험은 앞으로도 체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생산력 영역의 진보는 세계가 인정하는 바다. 우리 삶은 절대적·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개선되고, 나라의 지위도 뚜렷이 나아졌다. 개화기였던 19세기 말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제력 격차는 1 대 10 수준이며, 이런 상황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제 이 비율은 1 대 3 정도로 좁혀졌다. 더 중요한 점은 불리한 국제적 여건 속에서 거의 자력으로 생산력 진보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의 의지가 다른 어떤 요인보다 크게 작용했다. 이는 생산력 문제가 담론기마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과도 상응한다.
대외관계는 중요하면서도 확실한 해법을 찾기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 ①~④ 시기에는 모든 담론을 좌우하며 우리의 힘을 약화했고, 그 뒤에도 상당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구적 차원의 국제관계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힘이 약한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할지 모르지만, 우리 경우는 너무 가혹했다. 그 상처는 지금도 크고 깊다. 시기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외관계는 우리 사회의 내부 분열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뚜렷한 현상은 민주주의 관련 담론의 확대·심화다. 담론기 ①은 엘리트가 주도했으나 동학농민혁명이 결정적 계기가 된 ②부터는 민중의 역량이 분명해진다. 그 힘을 바탕으로 ③에서는 지구촌 전체에서도 이례적으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고, ④ 시기에는 민중의 다양한 목소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됐다. 4·19혁명으로 ⑤시기를 연 민주화 동력은 강고한 군사주의에 억눌렸으나, 6·10민주항쟁이라는 더 큰 힘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민주화 시대를 이룬 뒤(⑥) ⑦ 시기에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97년 외환위기까지 10년은 우리 근현대에서 국민 정서가 가장 낙관적이던 때이기도 하다. 이는 여러 담론 영역 가운데 민주화가 가장 근본적임을 방증한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지금은 세계사적으로 냉전 종식 이후 출현한 ‘신자유주의-남북 시대’가 막바지에 이른 시기다.
미국은 체제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낸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10년 이상 지구촌 규모의 재편을 꾀하고 있으나 동요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지금이 재편기가 아니라 해체기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커지는 갈등 또는 격렬한 충돌로 기존 체제의 힘이 소진되고 새 체제, 새 시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이르면 2020년대 초반, 늦어도 중후반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다음 대통령이 집권하는 시기에 대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시대 변화를 결정하는 세 가지 힘 가운데 민중의 움직임이 가장 근본적이다. 다른 두 힘인 지배세력 사이 경쟁과 생산력 변화 역시 중요하지만, 민주주의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세계에서는 다수 민중의 의지가 새 시대를 열 위력을 발휘한다. 현재 유럽과 미주 대륙을 중심으로 극우 세력이 세력을 키우는 현상도, 이들 세력의 일탈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민중의 불만이 만족할 만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커진다는 측면에서 바라봐야 새 시대에 대비할 수 있다.
■ 촛불혁명은 ⑦ 시기에 못다 이룬 과제를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의 담론기를 열 계기였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준비가 부족하고 국제적 여건도 성숙하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있다. 체제 문제만 봐도 그렇다. 체제 전환은 정치 격변을 동반하며, 민주 국가에서 체제가 바뀌려면 개헌 또는 깊이 있는 정치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개헌 논의는 실종된 상태이고 정치개혁 또한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필자는 다음 시대를 ‘신복지국가-다극화 시대’로 표현한 바 있다. 경제·사회 면에서 국내 통합과 국제 협력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신복지국가 체제와, 지구촌 주요 세력들이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는 다극화 체제가 결합한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대외관계가 더 복잡해진다. 각 나라의 역량과 선택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특히 비핵화 문제에서는 남북의 주체적인 결단을 기본으로 한 새 틀이 필요하다. 꼭 4차산업혁명에 대비하는 게 아니더라도 각국 실정에 맞게 생산력 향상을 꾀하고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필수다.
체제 문제도 새 시대에 맞게 새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 우리 체제는 경제·사회 면에서는 격차와 갈등을 심화시키고, 정치 면에서는 지역주의와 남북 대결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폭넓은 개혁이 요구된다.
가장 지속적이고 핵심적인 과제는 민주주의 심화·확대다. 민주주의 역량은 다른 과제 해결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힘을 폭발적으로 확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격차 축소와 복지 확대가 이뤄져야 한다. 발전하는 민주 국가에서 저출산·고령화는 장애물이 아니라 풀어야 할 조건일 뿐이다. 바뀌는 인구 구조에 맞게 일과 생활에 대한 새로운 인식 틀이 나와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있어야 다음 시대의 담론기는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 있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