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 세계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인류사회의 최대 현안은, 말할 것도 없이, 기후변화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반도 비핵화를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큰 숙제이지만, 한반도나 동북아시아도 지구사회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설령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기후변화라는 총체적인 파국이 덮치면 그 평화도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여러 자리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우리에게는 절실한 현안이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녹색화가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과제다. 한반도 녹색화라는 대명제하에서 비핵화를 추진할 때라야만 비핵화도 의미가 있다. 또 그럴 경우에만 한반도 문제에는 무관심하지만 지구환경 문제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진 많은 외국인들을 우리의 우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예외가 없진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기성세대일수록 고령층일수록 그렇다.
한국인들이 미세먼지 외에 기후변화를 비롯한 토양오염과 사막화, 허다한 생물종의 사멸, 죽어가는 해양 생태계 등등, 보다 근본적인 환경위기에 대한 의식이 약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먹고살기 바빠서일까? 그러나 비교적 여유가 있는 생활인이나 지식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이 안 된다. 따져보면, 오늘날 한국은 세계의 손꼽히는 부국 중 하나이다. 국토나 인구로는 큰 나라가 아니지만 남한의 원유 수입량은 세계 7위인데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독일이나 일본을 훨씬 능가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환경위기에 소극적인 것은 어째서일까?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언론에 있음이 분명하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내게는 언론 지면을 들여다보는 게 갈수록 공허하게 느껴진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의 언론 지면은 정치권의 유치한 말싸움, 유명인사나 ‘스타들’에 얽힌 가십성 기사, 사회적 부조리나 불의에 대한 단세포적 고발과 폭로, 너절한 해외여행담, 상투적인 ‘위로’와 ‘힐링’ 등등, 시시한 잡담으로 늘 넘쳐난다. 한국의 언론만 보고 있으면 지금 세계가 얼마나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 인류문명이 어떻게 붕괴 직전까지 왔는지 거의 알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언론보다 더 크고 직접적인 책임이 정치가들에게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오랫동안 거짓과 위선의 정치에 치를 떨면서 상식과 이성을 존중하는 ‘민주정부’의 등장을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과연 기대한 대로 집권 초기에 문재인 정부는 매우 합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원전 문제를 ‘공론조사’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 등은 국민주권의 원칙에 충실한 자세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재인 정부의 열성적인 노력이었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그 평화구축 과정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초기의 압도적인 지지율이 급격히 가라앉는 분위기에서 다시 기세가 살아난 수구파 정치세력의 무차별적 사보타주로 국회가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동안, 문재인 정부는 어딘가 나침반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노정하기 시작했다. 하기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제1야당의 시대착오적 행태가 고쳐지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의 개혁 노력이 ―그게 무엇이든―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막연히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마치 자신들을 구해줄 ‘야만인들’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던 멸망 직전의 로마인들처럼?
하기는 오늘날 정치가 문제 해결의 열쇠이기는커녕, 정치 그 자체가 가장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되어 있는 현상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아마도 선거로 정치가들을 뽑는 거의 모든 나라의 정치가 기본적으로는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치가들이 임기 내내 하는 일이란 다음 선거에서 또 이기기 위한 궁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외의 문제는 그들에게 모두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발언이 지난 4월23일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영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왔다. 지금 기후변화에 대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민감한 이 소녀는, 영국의 국회의원, 장관, 언론인, 일반시민들을 향한 연설에서 “지금 정치가들은 인기를 잃을까봐 두려워서 녹색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 대의제 정치가 어째서 기후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명쾌히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산업의 대폭적 축소가 필요함을 모르지 않는 정치가일지라도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성장 논리에 깊이 중독돼 있는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고, 그 때문에 ‘녹색 성장’이라는 기만적인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 어린 소녀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류사회가 기후위기에 옳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긴급한 비상상황으로 간주하고, 이를테면 ‘녹색 총동원 체제’를 강구하는 게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의제 정당정치가 과연 이러한 비상상황에 대응할 능력이 있을지 혹시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더 효과적인 시스템이 아닐지 따져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어리석음을 자초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만으로는 결코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하고, 예를 들면 ‘숙의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를 적극 도입·활용함으로써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돌아보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산업혁명기에 발흥하여 근대적 산업체제와 더불어 성장해왔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라는 근본적 한계에 부닥침으로써 근대적 산업체제의 수명이 사실상 끝났듯이 대의제 정당정치도 이제 근본적인 탈바꿈이 필요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기후과학자들에 의하면 향후 12년, 즉 2030년까지가 결정적인 기간이다. 그 기간 내에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체제를 극적으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대파국은 필연적이라는 과학적 경고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정치적 결단을 미루면서 우물쭈물 이대로 갈 수는 없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어디서든, 국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기 위한 치열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