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원
통일외교팀 기자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데이빗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도주의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 데이비드 비즐리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이 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을 만나 밝힌 입장이다. 한국 정부의 ‘뼈를 때리는’ 말이다.
2017년 9월, 한국 정부는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에 800만달러의 인도지원을 결정한다.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심의·의결도 마쳤다. 하지만 그 뒤 1년9개월 동안 북쪽에 ‘비스킷’ 하나 건네지 못했다. 800만달러 공여는 시한을 넘겨 무산됐다. 그 배경에는 대북 인도지원에 대한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거부감과 한국 정부의 전략 실패가 있다.
미국은 인도지원조차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며 번번이 한국의 지원을 만류했다. 특히 한-미 워킹그룹이 발목을 잡았다. 정부는 워킹그룹이 비핵화와 남북협력 문제를 두루 논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취재 현장에서는 미국이 워킹그룹을 남북 합의 이행 등을 ‘단속’하거나 제동을 거는 도구로 활용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들린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말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의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 신청을 허가할 계획이었고, 실제 언론 보도도 있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좌절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방북 승인 계획을 미국에 알린 시기는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워킹그룹 회의차 미국에 머물던 지난해 10월21∼23일과 겹친다.
한국 정부가 처음부터 워킹그룹에서 대북 인도지원 문제를 논의하도록 한 게 패착이었다. 비즐리 사무총장 말대로 정치와 인도주의는 분리돼야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취지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막자는 것이지 북한 주민들을 볼모로 삼아 비핵화를 하려는 게 아니다.
북-미 대화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인도지원과 관련해 줄곧 ‘시기를 보자’는 입장”이라며 “(북-미 협상에서) 좋은 국면이 지속되면 좋겠지만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면서 인도지원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미국은 대북 인도지원이 북한의 숨통을 틔워주면 어쩌나 걱정한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실제 지난해 10월 통일부는 국회 업무보고를 계기로 ‘800만달러 공여 추진’을 발표하려 했지만 미국의 벽에 부닥쳤다. 캐나다 등 미국 우방국은 제재가 지속되는 중에도 꾸준히 대북 인도지원을 하고 있다.
“사실 인도지원 문제는 정부가 하고자 하면 그냥 하면 된다.” 인도지원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취재하다 만난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실제 그렇다. 14일 정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에볼라 대응을 위해 국제기구를 통해 50만불 인도 지원을 결정했다. 지난 3일 사이클론 피해를 입은 모잠비크에 30만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고, 4월엔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한 베네수엘라와 난민 수용 부담을 진 콜롬비아·페루·에콰도르에 30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3월에는 태풍 피해를 입은 모잠비크·짐바브웨·말라위에 50만달러, 마다가스카르 홍역 피해 대응을 위해 20만달러, 2011년부터 내전을 겪는 시리아와 그 주변국을 위해 올해 1200만달러 규모의 인도지원을 결정했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에서는 시기가 중요하다. 지난해 9월 태풍 솔릭이 북한을 강타했다. 국제적십자사는 심각한 홍수로 76명이 목숨을 잃고 75명이 실종 상태라고 공식 발표하고 수색, 구출에 나섰다. 실종자 대부분은 어린이였다. 당시 기사를 쓰면서 통일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남북정상회담 뒤 남북관계도 좋아지는데 긴급 지원 계획이 없느냐’고 물었다. “북쪽에서 요청이 오면 검토하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요청이 없다.” 통일부 관계자의 답변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이 지난 3일 발표한 ‘북한의 식량안보 평가’ 보고서를 보면 올해 7∼9월에 식량 부족 현상이 심화될 거라고 한다. 한국 정부가 국제기구에 기금을 보낼 경우 실제 수혜자들이 식량을 받기까지 6개월 안팎의 시간이 걸린다. 한국 정부가 쌀, 옥수수 등 식량을 직접 북쪽에 보내면 실제 지원이 시작되기까지 보통 1∼2개월이 걸린다. 7월까지 두달이 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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