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부문장 내 고향을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의 지역 사무실에선 때때로 ‘민원인의 날’ 행사를 알리는 문자가 온다. ‘답답한 얘기, 억울한 사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올림.’ 대략 2주에 한번꼴로 토요일에 열리는 것 같다. 그 의원의 ‘지역구 활동’에는 ‘찾아가는 고충상담’도 있다. 그의 누리집을 보면, 이 행사는 매주 주말에 열리는데 상담 내용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초등학교 급식시설 부족, 동네 하수관거 설치, 아파트 공사 소음 대책…. 의정활동만으로도 바쁠 텐데 매주 먼 거리의 지역구에 내려가 ‘깨알 민원’에 귀 기울이는 걸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의문도 든다. 국회의원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그럼 지방의원들은 뭘 하지? 지역구 주민 고충 상담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할 국회의원이 지역구 민원 해결사 노릇에 힘을 쏟는 것이 바람직하기만 한 일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국회의원들이 틈만 나면 지역구 행사에 발품을 팔고 지역 주민들에게 눈도장을 찍는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표를 얻기 위해서다. 재선을 꿈꾸는 의원이라면 4년 내내 ‘금귀월래’(금요일에 지역구에 내려가 월요일에 서울로 돌아온다는 뜻)를 실천해야 한다. 좋은 법률을 만들고 정책을 내놓는 것은 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역구 아동복지시설 개선 공사에 힘을 써주면 생색이 나지만, 의정활동을 통해 더 나은 아동복지 정책을 마련하는 일은 ‘남는 장사’가 아니다. 표를 얻는 데 가장 ‘약발’이 좋은 것은 예산 확보다. 숱한 비판에도 ‘쪽지 예산’ ‘실세 예산’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예산 나눠 먹기’라는 욕을 먹는 것이 오히려 득표에는 도움이 된다. 선거 때는 지역에 ‘예산 폭탄’을 퍼붓겠다고 약속한다. 예산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행태는 자원 배분의 왜곡을 가져온다. 올해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도 일자리·복지 예산은 깎고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예산은 늘리는 구태가 반복됐다. 때로는 표를 얻기 위해 정당의 정책과 상반된 공약을 내걸기도 한다. 당의 입장은 특목고 폐지인데, 후보는 특목고 유치를 약속하는 게 대표적이다. 지역구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는 정체성이 정반대인 정당의 의원들과도 쉽게 ‘이익 동맹’을 맺는다. 이렇듯 의원들이 지역구의 압도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선거제도에 있다. 한 표라도 더 얻는 후보가 당선되는 소선거구제 아래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나라 전체의 이익보다는 지역구의 이해에 매몰되고 정책 경쟁보다는 선심 경쟁에 빠져들기 쉽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삶의 질이 높은 복지국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정당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당들이 국민의 삶을 개선할 정책을 내놓아야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 의석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스웨덴 등 올해 유엔의 ‘세계 행복도 조사’에서 10위 안에 든 나라 가운데 9곳이 비례대표제 국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보면, 비례대표제 국가들이 단순다수제(소선거구제) 국가와 견줘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소득불평등도는 낮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다. 요컨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더 좋은 정치가 필요하고, 더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은 더 좋은 선거제도다. 지난달 말 어렵사리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선거법 개정안은 정의당 등 야3당과 시민단체의 요구에서 후퇴한 안이다. 지금보다는 비례성이 확대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온전한 연동형이 아닌 ‘준연동형’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좀 더 비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새 선거제를 통해 구성되는 21대 국회에서는 새로운 정치의 단초를 보고 싶다. 사족 하나. 패스트트랙 국면에 식당에서 혼밥을 하는데, 옆자리에서 뉴스를 보던 어르신들이 역정을 냈다. “왜들 저래? 먹고살기도 힘든데. 선거제가 밥 먹여줘?” 그분들께 이 말을 못해준 게 못내 아쉽다. “네, 선거제가 밥 먹여줍니다.”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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