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30년 전인 1889년 늦봄,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의 옛 화형대 자리에 한 인물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등 지식층이 건립을 추진했다. 몸은 교황청 쪽을 향했고, 내리깐 눈에는 고집스러운 결기가 보인다. 받침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브루노, 그대가 여기에서 불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나폴리 출신의 가톨릭 도미니코회 수사였다. 그리스·라틴 철학에 밝았고, 이슬람의 선진 학문을 익혔으며,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지지했다. 우주는 무한하며,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별(항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무한우주론을 펼쳤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변화설’을 자연철학의 원자론으로 반박하고, 만물에 신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삼라만상에 위계를 정한 기독교 가치관과 충돌해 이단으로 몰렸다.
이탈리아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의 옛 화형대 자리에 세워진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종교재판의 심문관은 예수회 소속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 갈릴레이의 입에 재갈을 물렸던 인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강의하고 이단 신앙 논쟁론을 집필한 지식인이었으나, 결국은 낡은 체제와 사상의 수호자일 뿐이었다. 브루노는 화형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도 “당신들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보다 더 클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교회 권력자들은 그를 모욕하고 고문한 뒤 말뚝에 묶어 불태웠다.
자신의 성추행 피해를 고발하고 맞서 싸우려다 목숨을 잃은 누스랏 자한 라피. 트위터 갈무리
지난주 방글라데시의 한 마을에선 19살 여학생 누스랏 라피가 불법 화형으로 희생됐다. 2주 전 교장실에서 겪은 성추행을 가족에게 알리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나온 진술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사태가 꼬였다. 일부 남성들이 체포된 교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더 많은 남성들이 가세했다. 누스랏은 학교에서 부르카를 뒤집어쓴 일당에게 옥상으로 끌려갔다. 범인들은 고소 취하를 거절한 누스랏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닷새 만에 끝내 숨지기 전, 누스랏은 휴대전화로 동영상 성명을 남겼다. “교사가 내 몸을 만졌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범죄와 싸울 것이다.”
브루노와 누스랏은 시대와 신분, 성별과 나이는 달랐지만, 도그마에 빠진 지배적 권력의 횡포에 당당히 맞서 시대의 불꽃이 됐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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