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브루노와 누스랏을 누가 죽였나 / 조일준

등록 2019-04-24 16:09수정 2019-04-25 14:23

꼭 130년 전인 1889년 늦봄,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의 옛 화형대 자리에 한 인물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등 지식층이 건립을 추진했다. 몸은 교황청 쪽을 향했고, 내리깐 눈에는 고집스러운 결기가 보인다. 받침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브루노, 그대가 여기에서 불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나폴리 출신의 가톨릭 도미니코회 수사였다. 그리스·라틴 철학에 밝았고, 이슬람의 선진 학문을 익혔으며,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지지했다. 우주는 무한하며,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별(항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무한우주론을 펼쳤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변화설’을 자연철학의 원자론으로 반박하고, 만물에 신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삼라만상에 위계를 정한 기독교 가치관과 충돌해 이단으로 몰렸다.

이탈리아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의 옛 화형대 자리에 세워진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탈리아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의 옛 화형대 자리에 세워진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종교재판의 심문관은 예수회 소속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 갈릴레이의 입에 재갈을 물렸던 인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강의하고 이단 신앙 논쟁론을 집필한 지식인이었으나, 결국은 낡은 체제와 사상의 수호자일 뿐이었다. 브루노는 화형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도 “당신들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보다 더 클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교회 권력자들은 그를 모욕하고 고문한 뒤 말뚝에 묶어 불태웠다.

자신의 성추행 피해를 고발하고 맞서 싸우려다 목숨을 잃은 누스랏 자한 라피. 트위터 갈무리
자신의 성추행 피해를 고발하고 맞서 싸우려다 목숨을 잃은 누스랏 자한 라피. 트위터 갈무리
지난주 방글라데시의 한 마을에선 19살 여학생 누스랏 라피가 불법 화형으로 희생됐다. 2주 전 교장실에서 겪은 성추행을 가족에게 알리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나온 진술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사태가 꼬였다. 일부 남성들이 체포된 교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더 많은 남성들이 가세했다. 누스랏은 학교에서 부르카를 뒤집어쓴 일당에게 옥상으로 끌려갔다. 범인들은 고소 취하를 거절한 누스랏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닷새 만에 끝내 숨지기 전, 누스랏은 휴대전화로 동영상 성명을 남겼다. “교사가 내 몸을 만졌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범죄와 싸울 것이다.”

브루노와 누스랏은 시대와 신분, 성별과 나이는 달랐지만, 도그마에 빠진 지배적 권력의 횡포에 당당히 맞서 시대의 불꽃이 됐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