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주의 체제는 강고했다. ‘체육관 대통령’이 국민을 동원과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이 체제는 1979년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끝나야 했으나 그렇지가 못했다. 80년 5·18 민주화운동과 서울의 봄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체제의 핵심 요소를 그대로 갖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담론기’는 이 정권을 심판한 87년 민주화 대투쟁에서 시작해, 남북 당국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한 91년 말까지 이어진다.
■ 민주화 대투쟁은 민(시민·민중·국민)의 힘으로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이룬다.
그 한가운데에,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거세진 민주화 시위가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한 6월 민주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다.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6·10국민대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리고, 6월26일 시위에는 무려 140만명이 동참한다. 직선제 개헌을 핵심 내용으로 한 6·29선언은, 정권 쪽의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후퇴라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되돌릴 수 없는 민주화 과정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산업화를 떠받친 노동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영남권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파업 물결이 이어지면서 87년 말까지 1361곳의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지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1989), 전국노동조합협의회(1990), 전국농민회총연맹(1990) 등 전국 단위 조직이 결성된다. 민주노조 운동이 실질임금 향상으로 연결돼 중산층 확대를 끌어낸 점도 중요하다.
87년 말 들어선 노태우 정권이 ‘옷만 갈아입은 군사정권’이라는 비판 속에서 복지와 분배를 강조한 것도 민주화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 제도가 88년 시행에 들어가고, 건강보험이 농어촌지역(88년)과 도시 자영업자(89년)까지 확대돼 전 국민 건강보험 시대가 시작된다. 담론 경쟁이라는 면에서 보면, 민이 주도하고 정부가 대응하며 경합하는 양상으로 진행된 셈이다.
■ 담론 경쟁이 더 치열했던 분야는 한반도 관련 사안이다.
먼저 움직인 쪽은 민간이다. 88년 새 학기가 되자 대학생들은 서울올림픽의 남북 공동개최에 더해 6·10 남북학생회담과 8·15 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며 대규모 출정식을 연다. 88년 9월 21개 시민사회단체의 범민족대회 개최 촉구, 학원가의 대대적인 ‘북한 바로알기’ 운동, 89년 1월 방북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북쪽과의 ‘금강산 개발에 관한 의정서’ 체결, 89년 3월 전민련 상임고문인 문익환 목사의 방북, 89년 6월 전대협이 파견한 임수경 대표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및 8월15일 판문점 귀환 등은 냉전 질서를 허물고 통일 논의에 물꼬를 트는 큰 흐름을 만든다.
정부도 기민하게 대응한다. 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헝가리(89년 2월),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루마니아(90년 3월) 등 사회주의권과의 수교가 빠르게 이뤄지고 소련(90년 9월), 중국(92년 8월)과의 수교로 정점을 찍는다. 대북 비공개 접촉이 활발하게 진행돼 91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이 각각 유엔에 가입한 데 이어 12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다. 이 문서는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해나가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모든 분야의 관계 발전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정부와 민간의 움직임은 하나로 합쳐지지 못한다. 정부는 창구를 일원화해야 한다며 민간 통일운동을 막고, 나아가 공안정국을 조성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이후에도 되풀이되는 이런 양상은 냉전 질서를 청산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 이 시기는 우리 경제가 질적인 전환을 요구받은 때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고도성장과 더불어 기형적인 재벌 체제와 경제구조 왜곡을 낳았고, 86~88년 이뤄진 78개의 부실기업 정리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한다. 우리 경제의 앞날을 가름할 이 시기에, 관련 담론이 폭넓게 이뤄지지 못한 채 재벌 주도 자유화 쪽으로 큰 흐름이 잡힌다. 80년대 후반 우리 경제는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이른바 3저현상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다. 여기에는 플라자합의 등 대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와 무관한 3저호황에 홀려 자신의 개혁에는 눈을 감은 셈이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부동산 경기에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틀을 잡은 것도 이 시기다. 1980년만 해도 전국 주택 531만9천채 가운데 아파트는 39만1천채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단독주택(465만2천채, 다세대주택 포함)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하면서, 90년이 되면 전체 716만채 가운데 단독주택은 거의 그대로(484만2천채)이지만 아파트는 167만8천채로 늘어난다. 88년 정부는 이후 6년 동안 서울 근교에 5곳의 신도시를 만들어 200만채를 짓겠다고 발표한다. 집값을 올려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각종 조처가 뒤따른다. 88~91년 서울 지역 아파트값은 평균 2.6배로 뛰고, 온 국민이 전례 없는 부동산 광풍에 휩싸인다.
■ 민주항쟁 때의 핵심 요구는 대통령 직선제다. 민주주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당연하게 여긴 정치체제다. 이후 오랫동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민의 요구는 항상 민주 ‘회복’이었다. 그 염원이 대통령 직선제로 단순화한 것은 당시 민주화 운동의 한계를 보여준다. 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분열된 민주 세력은 12·12 쿠데타 때 전두환의 하위 동료였던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겨준다.
노태우 정권이 90년 2월 인위적인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만들어 국회 의석의 72.2%를 장악한 것은, 이후 더 심해진 공안몰이와 맞물려 복지·외교안보 분야의 제한된 성취마저 무력화한다. 3당 합당은 우리 정치의 고질인 지역주의를 고착시키고 심화한 점에서 잘못이 크다. 체제 문제에 관한 당시 담론이 대통령 직선에 이은 3당 합당으로 귀결된 것은 ‘87년 체제’의 원초적 한계를 드러낸다.
■ 우리 현대사는 87년을 분기점으로 독재 시대와 민주화 시대로 나뉜다. 식민지 경험을 한 나라 가운데 자신의 힘으로 민주 체제를 만든 사례는 아주 드물다. 남북관계를 비롯한 대외 관계 재정립과 생산력 발전이라는 면에서도 87~91년 시기는 민주화에 걸맞은 내용을 상당 부분 보여준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유령처럼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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