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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달라진 게 뭡니까’ / 김영배

등록 2019-04-11 17:22수정 2019-04-11 19:25

김영배
논설위원

막말 폭탄의 도화선이었던 ‘주주권 행사에 따른 재벌 총수의 첫 퇴진’은 온갖 요소들이 두루 갖춰져 아귀가 딱딱 맞고서야 세워진 진기록이었다. 국민연금이 3월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진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외국계 연기금이 반대쪽으로 돌아선 것, 가족들의 기이한 언행에서 촉발된 비판 여론도 여러 몫의 하나였을 뿐이다.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만든다며 이사 선임 요건을 과반에서 3분의 2 찬성으로 높인 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대목 하나만 빠졌어도 안 될 일이었다. 그 모든 게 충족된 뒤에라도 조 회장 스스로 물러나는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별세한 8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 조기가 걸려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별세한 8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 조기가 걸려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 회장의 별세를 두고 ‘연금 사회주의의 첫 피해자’라고 뇌까린 흰소리를 조족지혈로 가볍게 밀어낸 ‘인민민주주의’니 ‘인민재판’이니 ‘정권의 간접 살인’ 따위를 배설한 이들이 이런 실상을 모르고 하지는 않았을 터다. 웃기자고 한 목적이었다면 성공한 셈이고, 정치적 열매를 따려는 노림이었다면 글쎄이며, 고인과 유족에 대한 나름의 두둔이었다면 성공은커녕 예의에도 어긋난다.

연금 사회주의로 총수의 경영권을 박탈했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건 해봐야 입만 아픈 소리고, 지난 주총 때 같은 일의 재연을 내 평생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많아 봐야 대개는 5~10%인 국민연금의 지분율로 의미 있는 결과를 끌어낸 사례가 다른 주총에선 없었다는 사실로 방증된다. 국민연금에 경영권을 뺏길 것 같다는 걱정은 접어둘 일이다.

정작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오히려 그래서 뭐가 바뀌기나 한 것이냐이다. 청와대 모임에서 대통령을 향한 ‘달라진 게 뭡니까’라는 청년 대표의 질문은 여기에도 던져져야 한다. 회장의 빈자리를 누가 채우고 있고, 인사를 누가 좌우하고 있으며, 자금줄은 또 누가 쥐고 있는가. 경영권을 박탈당했다고? 언제, 무엇을 뺏겼다는 것인가?

‘촛불 혁명’ 뒤 청년의 삶처럼, ‘자본시장의 촛불 혁명’ 뒤 기업 경영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없다면 열망이 환멸로, 환멸은 체념으로 이어지고 체념은 퇴행을 부를 것이다. ‘달라진 게 뭡니까’라는 질문은 그 위험한 역주행 경로에 작은 둑 하나 쌓는 출발점일 수 있다. 그 물음 속에 환멸과 체념을 넘어서는 관심과 각성에 바탕을 둔 촉구의 뜻을 담았다면 말이다. 기업 경영의 문제만 놓고 볼 때 촉구라는 게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그저 법을 지키라는 요구만으로도 당장은 족하다.

대한항공의 예로 돌아가 의미 있는 변화의 가능성은 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아니라, 상속·증여세법에 따라 회장의 자녀들이 세금을 제때 제대로 내는 일에서 비롯될 것이다. ‘법대로 하자’는 냉랭한 법 만능주의 말고 ‘법은 좀 지키고 살자’는, 도덕의 최소한에 해당하는 그 법 말이다. 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결과가 3~4세 체제에 접어든 한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일면 아닌가? 법에 정해진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편법·탈법·위법의 꼼수로 지분을 움켜쥔 것을 바탕 삼아 자리까지 세습하고 있는 일이 잦아 경영계 전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의 온도가 낮다는 걸 옛이야기로만 돌릴 수 있을까.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의 일갈처럼 당최 경영권이란 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 (법적으로 명확한) 노동기본권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된 이념적 산물’에 불과하니 도대체가 뺏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야 자유지만, 이사에 선임되고 회사 경영을 주도할 자리에 올라서려면 ‘주식 공화국’(주식회사)의 ‘시민’(주주)들한테서 표를 받아야 한다. 득표 요건은 핏줄이 아니고 회사를 건강하게 꾸려갈 경영 지능과 근육이어야 할 테고. 재산의 상속과 자리의 세습을 뒤죽박죽 섞고 싶다면 내 돈만으로 쌀집을 차릴 일이다.

세습의 ‘습’(襲)은 본래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 수의의 뜻이었다고 한다. ‘습’자에 ‘염하다’는 뜻이 아울러 들어 있는 게 이 때문이다. ‘죽음이 엄습하다’에서 나아가 ‘예고 없이 닥친다’는 뜻으로 확장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니 그리 길한 단어는 아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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