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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윈드러시 세대와 브렉시트 / 조일준

등록 2019-03-31 17:45수정 2019-03-31 20:02

1930년 12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몬테로사’로 명명된 크루즈 여객선의 진수식이 열렸다. 길이 152미터, 폭 20미터, 디젤엔진 4개를 장착한 1만3882톤급 초대형 선박이었다. 민간 해운사에 인도돼 유럽 연안을 누볐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부터는 나치가 국민에게 다양한 여가 활동을 제공한 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KDF)이 운용했다. 고위 권력자와 나치 당원, 부자와 충성심 높은 국민들이 레저 유람을 즐겼다. 배도 승객도 좋은 시절이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몬테로사는 제국 해군에 징발됐다. 병력 수송, 군인들의 병영 및 휴양선으로 활용됐다. 노르웨이에서 추방당해 아우슈비츠로 가는 유대인들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초 병원선으로 개조됐고, 러시아군에 패퇴한 자국 군인들을 후송했다. 그해 5월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몬테로사는 영국의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영국은 몬테로사를 군용 수송선으로 배치한 데 이어, 1947년 1월 새 선박명을 붙였다. ‘엠파이어 윈드러시’. 제3제국(나치)의 흔적을 지운 자리에 또 다른 ‘제국’(엠파이어)의 칭호가 새겨졌다.

윈드러시의 최후는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다. 1954년 3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부상자들을 후송하려 일본을 출항해 영국으로 향하던 중 지중해에서 큰불이 나 침몰하고 말았다. 1천명이 넘는 탑승객 중 화재가 발생한 엔진실의 승무원 4명만 숨졌을 뿐, 나머지 모든 승객은 무사히 구조됐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전리품으로 획득해 새로 명명한 엠파이어 윈드러시호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전리품으로 획득해 새로 명명한 엠파이어 윈드러시호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나 영국에서 윈드러시호가 유명해진 게 그 기구한 사연 때문만은 아니다. 1948년 5월 윈드러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길에 중미 카리브해의 자메이카에 들렀다. 현지에 남아 있던 영국 병사들을 귀국시키는 임무였다. 한달여 항해 뒤 런던에 입항한 이들 중에는 492명의 서인도제도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식민지의 ‘유색인’들이 이 배를 타고 모국의 ‘시민’으로 이주해 온 것.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에는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엄격히 통제하는 법규가 없었다.

1948년 제정돼 이듬해 발효한 국적법은 영국 태생뿐 아니라 해외 식민지와 영국연방 국가 출신에게도 모두 ‘영국 국민’으로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부여했다. 덕분에 매년 유색인 이민자들이 폭증하자, 영국은 1962년 제정해 이듬해 발효된 이민법을 시작으로 식민지 출신의 무제한 이주에 대한 문턱을 차츰 높여갔다. 급기야 1971년에는 영국연방 출신과 외국인 이민의 구분마저 없애고 입국을 통제했다. 그 이전까지 영국에 들어온 이민자들이 ‘윈드러시 세대’다. 전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노동력 공급원이기도 했다.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앞둔 영국에선 ‘불법 이민자’ 문제를 놓고 갈등이 깊다. 지난해 4월엔 행정 착오로 윈드러시 세대의 건강보험을 차단하고 강제추방하려던 계획이 들통나 말썽이 났다. 결국 내무장관이 물러나고 테리사 메이 총리가 공식 사과했다. ‘윈드러시 스캔들’로 불린 이 사건은 옛 영화를 잃은 영국연방, 나아가 ‘제국’이 씨앗을 뿌린 이민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상징적 오점으로 기록됐다.

윈드러시 스캔들이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것도 암울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 3월15일 뉴질랜드에서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오스트레일리아 청년이 총기를 난사해 모스크에서 예배 중이던 무슬림 이주자 50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 테러는, 배제와 혐오의 씨앗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터져나온 가장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조일준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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