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편집이사 냉전시대 가장 유명한 스파이의 하나였던 귄터 기욤은 본래 사진가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패전 후 폐허가 된 베를린에 돌아온 이 전직 나치 당원이 잡은 첫 직업이 사진가였다. 사진가는 곧이어 ‘인민과 지식 출판사’(국정교과서 발행처)의 편집자가 되었고, 편집자는 다시 보위부 장교가 되어 서독 침투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1956년 기욤과 아내는 서독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당 행사 때 앞에 나와 보도사진가용 그라플렉스 카메라로 솜씨를 뽐내는 기욤의 사진이 남아 있다. 1957년 4월 동독 정보부는 암호 방송으로 ‘게오르크의 득남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보낸다. 암호명 ‘게오르크’는 이미 전년 2월에 생일 축하 전문을 받았던 인물이다. 서독 헌법수호청은 이 전문을 해독한 뒤 보관해 두었다. 1973년, 총리실에 동독 에이전트가 있는 것 같다는 의혹이 떠올랐을 때 이 두 날짜는 빌리 브란트의 비서 기욤을 지목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1974년 체포된 기욤은 13년형, 아내는 8년형을 받았다. 혼자 남은 ‘게오르크의 아들’은 동독 당국이 데려갔다. 기욤은 아들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자랑할 만한 시민으로 키워 줄 것’을 당부했다.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 지난 17년간 집에서 그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동독 정보부의 수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는 극히 흥미로운 책 <스파이매스터의 회상>에서 자기가 떠안은 곤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꼬마 하나를 전담할 부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동독 사회에 적응할 생각이 없었고, 학교도 나오지 않고,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여자친구(기민당 간부의 딸)가 있는 서독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 부리곤 했다. 점점 가망이 없다고 느낄 즈음 사진이 소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우리는 외국의 최신 카메라와 사진 잡지를 조달해 대며 소년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1981년 기욤 부부는 동독으로 풀려난다. 피에르(아들의 이름이다)에 따르면 돌아온 부모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니 아들이 벼르던 질문(‘왜 이런 나라를 위해 스파이 일을 한 거죠?’)에 좋은 답이 주어졌을 리 없다. 아버지는 말했다. “내 아들이 서방 세계에서 사는 꼴을 보느니 여기 감옥에 가두는 게 낫다!” 한심한 말이지만, 뜯어보면 여기가 감옥이 맞다고 실토한 셈이다. 2년 뒤 기욤 부부는 이혼했다. 아들은 아버지와 연락을 끊어 버렸다. 피에르는 사진기자가 되었다. 1988년 당국에 출국 신청서를 냈고, 허가가 나자 곧바로 가족을 데리고 서독으로 이주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년 전이었다. 지금도 그는 신문 편집자로 일한다. 2004년 피에르는 회고록 <낯선 아버지>를 펴냈다. 17살까지 서독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도, 이후 동독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무엇 하나 진짜였다고 믿을 수 없게 된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를 포착하려 한 허망한 시도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3인칭으로(‘나는’ 대신 ‘피에르는’) 쓰여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3인칭으로 써보기도 한다. 자신은 분리되어 안전해지고, 위협이나 고통은 3인칭의 어떤 세계 속에 봉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책이 되면, 그 거리는 영원한 것이 된다. 피에르는 3인칭으로 처리된 책을 보며 이제 편안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든 발굴하고 재창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하다. 그러나 왜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피에르의 책이 말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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