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한반도는 결전장이다. 북한 백두혈통 사교 집단과 남한 운동권이 합쳐 그쪽으로 끌어가느냐, 북한 주민의 ‘여망’과 남한 자유민주 진영이 이쪽으로 끌고 오느냐 하는 사생결단….”
“문재인 정권 핵심은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다. 그들에게 타협이나 협상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 협치란, 가시꽃의 향연일 뿐이다. 소득주도성장, 비정규직 제로, 공공일자리 확대…, 문 정권의 모든 정책은 이 카르텔을 지키기 위한 포퓰리즘이다. 썩은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
두 글의 공통된 키워드는 ‘운동권’이고 ‘사생결단’ ‘뿌리를 뽑는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앞은 오랜 세월 ‘좌익 척결’에 앞장서온 전직 언론인의 글이고, 뒤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페이스북 글(2019년 3월19일)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8일 경남 통영시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안경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앞의 글은 사실 고색창연하다. 이른바 ‘좌파 파시즘’이라는 현 정권이 북한과 한통속이니 결딴내야 한다는 것인데, 요즘은 웬만한 보수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놀라운 건 황교안의 인식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문 정권=80년대 운동권=썩은 뿌리’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운동권 좌파’, 다시 말해 현 정권은 뿌리 뽑아야 할, 타도 대상이다. 협치는 ‘턱도 없는’ 소리다.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사람 좋아 보이는 황교안이 어쩌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도그마에 빠진 걸까. <황교안의 답―황교안, 청년을 만나다>에서 그는 인생의 첫 전환점은 교회, 두번째는 아내, 세번째는 공안부라고 썼다. 기독교와 공안이 그의 인생을 이렇게 버무린 것이다.
공안검사로 28년을 지냈으니 기록할 만한 족적은 거의 공안이다. 상사와의 갈등으로 겪은 사표 파동, 고검 검사로의 좌천, 두번에 걸친 검사장 승진 탈락 등이 시련 목록이다. ‘삶에 파란을 일으킨’ 특기할 만한 일은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사건,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정도다.
6·25 때 월남한 실향민의 아들, 고물상을 했던 아버지, 시장에 나가 노점상을 한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하면 선생님이 라면을 끓여주던 일 등 애잔한 에피소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도자로서의 스토리는 별로 없다. 이런 탓에 그가 정치에 뛰어들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들 봤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황교안은 요즘 제1야당 대표로 순항하면서 대선주자 경쟁에서 성큼성큼 선두를 달린다. 한 여당 중진 의원은 “황교안이 대통령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고 했다. 오랜 세월 강북의 작은 교회를 다니며 쌓은 기독교 근본주의, 우리 현실에서 고도의 정치행위와 다를 바 없는 공안 경험이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현 정권의 무능과 쇠락이라는 ‘손님 실수’는 더 큰 원군이 될지도 모른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는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그 악을 때려잡는 공안이 황교안을 ‘20세기 혁명 시대’에 사는 꼴통 보수, 공안 보수로 남겨놓았는데, 이 둘이 오히려 그의 강점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황교안 얘기대로 문재인 정부가 80년대 운동권 출신의 카르텔이라면, 1987년 6월항쟁, 1997년 첫 정권교체, 2002년 노무현 집권, 2016년 촛불은 도대체 무엇인가? 황교안식이라면 이 모든 게 80년대 운동권 카르텔의 ‘밥그릇 지키기’다. 국민은 그저 광장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민주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국민이다. 극렬 운동권은 한 시대의 화석일 뿐이다. 설령 남아 있다 해도 극히 미미하다.
대한민국은 좌파의 나라도, 우파의 나라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박정희의 나라인 동시에 김대중·노무현의 나라이기도 하다. 우파가 산업화, 민주화를 다 했다고 하면 억지다. 좌파는 훼방만 놓으니 축출 대상이라는 건 너무 나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얘기가 공안 우파, ‘빨갱이 토벌’ 우파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라는 점이다. 돈키호테처럼 허상의 좌파, 화석으로 남은 좌파, 상상 속의 좌파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우파’들이 아직도 활개 치고 있다. 이것이 황교안의 모습이고, 대한민국 정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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