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국내 정치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한다. 중도(좌)파의 여운형, 좌파의 박헌영, 우파의 김구와 이승만 등은 겉으로는 단결을 내세우면서도 각각 독자 블록을 형성하려 한다. 그 결과 골든타임에 해당하는 해방 이후 몇달이 분열 상태에서 지나가 버린다.
해방 3년의 담론에서 해결 못한 과제들은 전쟁과 이승만 독재를 거치면서 더 왜곡된다. 민중의 힘이 이를 바로잡을 계기를 만들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10여년의 고난을 더 겪어야 했다. 올바른 답을 찾아 실천하지 못한 담론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해방 3년의 담론에서 해결 못한 과제들은 전쟁과 이승만 독재를 거치면서 더 왜곡된다. 민중의 힘이 이를 바로잡을 계기를 만들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10여년의 고난을 더 겪어야 했다. 올바른 답을 찾아 실천하지 못한 담론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여러 과제가 있겠으나, 바뀐 역사적 조건에서 나라를 책임 있게 끌고 갈 주체를 확립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나라를 살펴보더라도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분명한 주체가 있느냐에 따라 앞날이 크게 달라진다. 이와 관련한 담론은 크게 봐서 ‘민주주의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다. 상황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를 미국이 먼저 차지했기 때문이다. 미국 군정이 주체가 되면, 우리가 중심이 돼 풀어야 할 모든 사안이 미국의 세계 전략과 미국 내 정치세력의 생각에 따라 다뤄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군사력을 비롯한 정치·외교 자원이 모두 빈약한 터라 군정을 거부할 수는 없다. 차선책은 국내 정치세력이 통합된 움직임을 보이고 다수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 미군정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우리 뜻을 중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2차대전 때 독일에 협력한 오스트리아가 좋은 사례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처럼 연합국의 분할 점령이 거론됐으나 정치세력이 손발을 맞춰 대응한 끝에 통합된 영세중립국 지위를 얻는다. 안타깝게도 국내 정치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한다. 중도(좌)파의 여운형, 좌파의 박헌영, 우파의 김구와 이승만 등은 겉으로는 단결을 내세우면서도 각각 독자 블록을 형성하려 한다. 그 결과 골든타임에 해당하는 해방 이후 몇달이 분열 상태에서 지나가 버린다. 단결의 중요한 계기는 한차례 더 있었다.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세력이 주도한 좌우합작 운동이 그것이다. 이들은 남한 내 좌우합작을 바탕으로 남북이 연대하는 연합을 지향한다. 미군정이 이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가 1946년 7월 제시한 합작 7원칙이 좌파 쪽으로 기울었다는 이유로 우파 세력은 별도의 8원칙을 내놓는다. 여운형이 다시 양쪽을 절충한 7원칙을 제시하자 김구 쪽은 찬성하지만 친일파가 주도하던 한민당과 이승만은 반대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1947년 초 결국 좌초한다. 의견 대립의 핵심 사안이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벌이었던 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친일파 문제는 이후에도 민주주의 발전에 최대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된다. ■ 두번째는 외세에 대한 태도다.
이 시기 담론은 신탁통치와 단독정부 수립 문제에 집중된다. 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외교장관 회의에서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논의한다. 미군과 소련군이 참여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을 기한으로 중국까지 포함한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결정의 핵심은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임에도, 국내에선 한반도가 38선으로 분할돼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는 내용이 부각된다. 즉각 우파를 중심으로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 ‘반탁=애국=친미, 찬탁=매국=친소’라는 왜곡된 구호가 범람한다. 미군과 소련군의 남북한 점령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짧은 시일 안에 통일된 독립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적 임시정부를 주체로 한 국제 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소의 현실적인 타협안을 거부한 채 남북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결국 신탁통치 문제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친일 세력은 힘들 게 없는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즈음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미-소 냉전이 시작될 조짐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남쪽 정치세력이 그 분위기를 활용하며 분단을 고착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잘못이다. 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왜곡해 반탁운동을 벌인 것에 못잖게 외세 의존적이며, 이런 분단 고착화 추세의 연장선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 그다음 담론은 토지개혁과 관련된다.
해방 3년에서 토지개혁은 친일파 처벌, 통일 정부 수립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의제다. 왜곡된 식민지 경제를 청산하고 근대 민족경제를 발전시키려면 토지개혁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동의한 개혁안은 지주의 이익을 어느 정도 보장하되 농민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과 한민당은 끝까지 반대하며, 미군정도 대체로 이들 편에 선다.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이 됐으나 의회를 장악하지는 못한다. 다수파인 소장의원들이 통과시킨 농지개혁법이 1949년 6월 시행에 들어간다. 가구당 3정보 이상 농지를 유상으로 몰수해 유상으로 분배하는 이 법률에 따라 1945년 35%였던 자작지 면적은 1951년 92~96%로 크게 늘어난다. 오랜 지주·소작제가 무너지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 흐름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전쟁도 기여한다. 우리나라의 토지개혁은 2차대전 이후 독립국 가운데 드문 사례로, 이후 급속한 산업화의 토대가 된다. 경제 면에서 또 하나 핵심 사안은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귀속재산)의 불하 문제다. 해방 직후 과거 일본인 기업체의 노동자들은 일본인과 친일파의 재산을 접수해 관리하는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한다. 미군정은 45년 11월 이를 부정하고 모든 귀속재산을 자신이 접수한다. 이 재산은 정부 수립 이후 집권세력에 가까운 이들을 중심으로 특혜 불하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귀속농지는 1948년 5·10선거를 앞두고 농민을 포섭할 목적으로 불하하기 시작한다. 군정이 끝날 때까지 전체 농지의 12.3%, 귀속농지의 85%인 19만9천정보가 50만여호의 소작농가에 돌아가 토지개혁을 뒷받침하는 효과를 거둔다. ■ 담론의 마지막 의제는 체제 문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둘러싼 논란이 그것이다. 1947년 후반에 이르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로 되고, 유엔 소총회의 결정에 따라 1948년 5월10일 단독 선거가 우파 세력 주도로 치러진다. 좌파와 임정 세력은 이 선거를 반대하고, 중도세력은 참여 거부와 참여 속 개혁으로 갈라진다. 결과는 우파 세력의 독무대가 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무소속과 소장파 후보가 절반 넘게 당선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승만·한민당 세력에 대한 추인이 아니라 이들의 단정·반공 노선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했던 셈이다. 제헌국회가 제정한 헌법도 상당히 균형 잡힌 성격을 띤다. 삼권분립과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 등 권력구조 외에 친일파 처벌을 위한 법률 제정, 주요 자원과 기간산업의 국유·국영 등이 헌법에 규정된다. 이는 임시정부 때부터 지향해온 민주공화국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한 의미를 갖는다. 소장파가 주도한 의회 또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과 토지개혁 등 개혁 의제를 추진하고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단정이라는 한계 속에서 법적인 형태로 분명한 민주공화국이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행태는 애초부터 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한 국가보안법 제정과 무리한 확대 적용, 소장파 의원들을 제압하기 위한 1949년 5~8월 국회프락치사건, 1949년 6월 친일 경찰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습격, 1949년 4월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한 연맹원 학살 등은 전형적인 독재정권의 모습이다. 해방 3년의 담론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은 이후 전쟁과 이승만 독재를 거치면서 더 왜곡된다. 결국 민중의 힘이 이를 바로잡을 계기를 만들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10여년의 고난을 더 겪어야 했다. 올바른 답을 찾아 실천하지 못한 담론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대기자 jkim@hani.co.kr
이슈한반도 평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