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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성평등 가로막는 ‘가짜 검열’ 프레임 / 최지은

등록 2019-02-25 17:57수정 2019-02-26 13:39

최지은
작가·<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엄살도 과하면 병이다. “군사독재 시대 때 두발 단속, 스커트 단속과 뭐가 다릅니까?” 지난 12일 여성가족부에서 발간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개정판에 대한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의 페이스북 글이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만 뭐가 다르냐고 하니 우선 묻겠다. 경찰이 가위를 들고 다니며 남성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다 거부하면 즉결심판에 넘기고, 자를 들고 다니며 여성의 치마 길이를 쟀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야만과, 도대체 무엇이 같은가?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양성평등 심의 조항을 고려하여 제안”하는 내용으로 어떤 강제성도 띠고 있지 않다. “뉴스, 토론, 교양과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특정 성의 시각이나 관점이 배제되지 않아야 합니다” “전통적인 성역할과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남성이나 여성을 조롱하거나 비하하지 않아야 합니다” 같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고민을 환기하는 정도다. 이는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갖는 방송 프로그램에 성평등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감을 의식하도록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 논란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지점은 부록으로 실린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 가운데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합니다”라는 세부사항이다. “획일적인 외모 기준을 제시하는 연출 및 표현”을 지양하자는 ‘권고’에서 이어지는 맥락이다. 외모의 기준은 주관적인데 ‘과잉 규제’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은 현재 한국 대중문화 영역에서 이상적으로 취급되는 여성의 조건이 하얀 피부와 극도로 마른 몸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여성 아이돌이 거식증으로 활동을 중단하는 일이 발생하고, 지극히 적은 식사량을 유지하는 여성 연예인이 ‘자기 관리’를 잘한다고 찬사받는 현실은 방송이 제시하는 신체 이미지의 획일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대중문화 속 특정한 외모에 대한 찬사와 이를 벗어난 외모에 대한 조롱 및 비하적 재현은 미디어를 통해 가장 쉽게 성적 객체화되는 청소년 여성에게 심각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지난해부터 10~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탈코르셋 운동’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과도한 꾸밈 노동과 신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성평등 운동의 일환이며 유의미한 사회적 변화다. 또한 불법촬영물 같은 소재가 ‘야동’이란 이름으로 희화화되는 예능, 임부 대상 성폭행 장면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안방극장에 그대로 공개되는 사회에서는 성평등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선미 여가부 장관을 ‘여자 전두환’ 같은 저열한 언어로 공격하는 하태경 의원을 비롯해 상당수 언론은 ‘규제’와 ‘검열’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공산주의’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성평등을 저해하는 데 앞장선다. 한국기자협회가 국가인권위원회와 만든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이나 보건복지부와 만든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이 버젓이 존재하지만 이를 지키는 매체는 거의 없으며, 누구도 이를 ‘검열’이라며 반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번 ‘논란’이 단지 여성가족부와 성평등이라는 가치 때리기에 불과함을 확인시킨다. 마지막으로,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에 따라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조직은 여가부가 아니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이며 위원회의 성비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6 대 3, 5 대 0이다. 우리 사회가 성평등을 이루기까지는 갈 길이 아주 멀고, 악의적인 발목 잡기에 휘둘릴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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