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지도자 자와할랄 네루는 1919년이 끝나갈 무렵, ‘윌슨적 순간’이 “지나가 버렸다”고 썼다. ‘윌슨적 순간’이란 쉽게 말해 1918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때부터 1919년 1차 대전 종전 후 파리강화회의까지의 짧은 국제정치적 시간을 일컫는다. 약소국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즉 “피지배 민족에게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는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열광했지만, 그 꿈은 곧 물거품이 됐다.
윌슨적 순간을 맞아 조선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3·1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중국에 있던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다. 중국의 량치차오는 공식 대표단으로 인정받았지만 열강 논의에서 배제됐다. 인도 역시 전쟁 중 영국의 자치 약속에 기대를 걸었지만 헛된 꿈이 됐다. 파리에 다소 늦게 도착한 김규식은 일본에 의해 연합국 접근이 철저히 차단됐고, 베트남의 호찌민 역시 서구 지도자들 근처엔 가지도 못했다. 이집트·이란·시리아 등도 마찬가지였다.(<제국의 폐허에서>, 판카지 미슈라)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의 기대는 애초부터 윌슨을 오해한 것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두를 아우른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에 속한 유럽인, 즉 폴란드·루마니아·체코·세르비아 등을 염두에 뒀다. 윌슨은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 ‘윌슨적 순간’이 지나가자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해 이집트·인도·터키 등 여러 민족이 궐기했다.
윌슨적 순간은 미국의 진보 지식인들에게도 큰 좌절을 안겼다. 당시 진보적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던 월터 리프먼은 윌슨의 1차 대전 참전을 지지하면서 전후 평화안을 만드는 윌슨 직속 ‘연구단’에도 참여했지만, 파리회의 결과는 최악에 가까웠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제국주의의 영토 분할에 윌슨이 손을 들어준 꼴이었다. 리프먼은 1919년 5월 <뉴 리퍼블릭>에 ‘이것이 평화인가?’라는 제목의 논설로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한반도는 이른바 ‘트럼프적 순간’을 맞고 있다. 윌슨적 순간이 전세계적 현상이었다면 트럼프적 순간은 적어도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키우고 있다. 27~28일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그 고비가 될 것이다. 윌슨적 순간과 달리 트럼프적 순간은 우리를 새 시대로 인도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백기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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