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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독서의 신’의 맨발 / 김지훈

등록 2019-02-17 18:04수정 2019-02-18 14:58

김지훈
책지성팀 기자

맨발에 샌들. 목이 늘어난 오래된 티셔츠. 티셔츠엔 아침에 먹은 듯한 식사가 조금 남아 있었다. 통역을 맡아준 김태성 번역가가 “탕누어는 아마 슬리퍼 신고 나올 거예요”라고 말한 대로, 탕누어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인터뷰에 나왔다. 카키색 재킷과 바지는 색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았고, 수염은 무성했으며, 머리는 길어 어깨에 닿았다. 이날 내가 통역이 이뤄지는 시간을 틈타 651장의 사진을 찍을 동안 그는 촬영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독서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대만 일급 작가에게 예의를 지키겠다고 양복을 챙겨 입고 간 내가 오히려 좀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페에서 어떻게 집필하는지 묻자 그는 작업 중인 원고와 만년필을 꺼내 보여줬다. 만년필은 2만원 정도에 샀을 법한 싼 플라스틱 재질이었다. 가방에서 꺼낸 두툼한 원고지 뭉치는 끝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원고지도 출판사에서 가져다준 것이라 한다. 그는 휴대전화와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메일을 보내거나 인터넷 검색을 해야 하면 카페에 같이 나와 있는 아들에게 부탁한다. 소설가인 아내 주톈신, 작가인 처제 주톈원, 아들까지 네 가족이 함께 살아서 그의 집엔 자기 책상 둘 곳이 없다. 아무리 타이베이 집값이 비싸도 대만의 대표적인 작가 부부가 그 정도도 마련하지 못할까 싶었다. 하지만 아마도 이미 그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젠 책상을 구비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초청도 대부분 거절한다고 한다. 대만 언론과 인터뷰도 “본질과 관련이 먼 질문만 한다”면서 잘 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 출판사나 문화재단에서 제안한 방한도 4차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중국도 강연을 간 적이 몇 번 안 되고, 그 외엔 일본 나고야대학의 요청에 응한 적이 있을 뿐 국외 출장도 거의 가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가 읽고 쓰는 일 이외에 외양이나 명성을 관리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고 검소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전혀 아니다. 사실 외양에 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문화적 배경에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책 판매량에 작가의 외모가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한국과 비교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다만 그의 몰입이 부러울 뿐이었다. 독서론을 다루는 책으론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평을 받는 <마르케스의 서재에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그의 생활이 증언하고 있었다. 그는 스무살 때부터 하루 6~8시간씩 책을 읽는 생활을 끊이지 않고 이어왔다고 한다. 그처럼 뭔가에 깊이 오랫동안 몰두해온 게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결국 한숨만 푹 내쉬었다.

지난 일주일간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 취재차 온 출장은 내겐 첫 대만 방문이었다. 그동안 대만이란 나라는 중국에 가려진 사각지대였다. 탕누어의 인터뷰와 깨끗하고 번화한 타이베이 시내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단을 겪지 않고 시간을 축적해온 대만 문화의 힘이 느껴졌다. 중국의 대중서들은 아직 함량 미달인 경우가 많고 좋은 책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같은 중국어권이지만 탕누어와 양자오 같은 저자들의 책은 아주 만족스러웠던 이유도 짐작됐다.

한국인 대만여행객이 최근 증가하는 추세인데 식도락이나 관광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도 연결되면 좋겠다. 대만의 일급 작가들은 대만의 딤섬이나 우육면보다 오래가는 만족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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