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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반기업 정서’라는 그 질긴 유령

등록 2019-02-14 17:27수정 2019-02-14 19:02

김영배
논설위원

“반기업 정서는 빠른 시간 안에 해소될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벤처기업인들의 하소연에 대한 화답 형식으로 나왔다.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열린 ‘혁신벤처기업인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기업이 커질수록 국민이 기업을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반기업 정서가 심해진다”고 토로했다 한다.

반기업 정서가 한국에서 유독 강하다는 말이 국내 재계에선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반기업 정서가 심해 투자를 하기 어렵고, 그러니 고용이 늘어날 수 없다’는 식이다. 경제 사정이 어려울 때면 더 힘을 받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혁신벤처기업인 간담회에서 시작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 책임, 문 대통령, 김범석 쿠팡 대표,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혁신벤처기업인 간담회에서 시작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 책임, 문 대통령, 김범석 쿠팡 대표,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내 반기업 정서가 유달리 심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계기로 꼽히는 건 다국적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의 2001년 조사 결과였다. 액센추어는 당시 22개국 880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다고 보는가?’를 조사했다. 한국은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70%로 나타나 1위였다. 2위는 영국(68%)이었다.

흔히 듣는 반기업 정서라면 밖에서 기업을 어떻게 보느냐로 여길 법한데, 액센추어의 조사 방향은 거꾸로였다. 그럼에도 기업에 대한 태도를 국가 간 비교연구한 첫 사례였기 때문인지, 이 조사 뒤 한국에선 반기업 정서가 화제에 올랐고, 후속 연구가 이어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1년에 한번씩 조사해 발표하는 기업호감지수(CFI)도 그중 하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관련 조사를 벌였고,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한 예도 있다. 국제 비교에선 대개 한국이 높은 편에 들었다. 반기업 정서가 강하다는 푸념의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은 셈이다.

반기업 정서에 대한 이들 연구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기업 일반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것도 대개 주관적 느낌을 묻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극과 극의 행태를 보이는 기업들을 한 덩어리로 여기게 한다. 재벌과 재벌총수의 불법행위, 정경유착, 각종 갑질에 대한 반감과 기업 일반에 대한 무심한 태도가 뒤섞여 인식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을 기업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인 것처럼 몰아세울 수 있다.

이들 조사는 또 사회의 일부인 기업을 다른 사회 조직·제도와 비교해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반기업 정서라는 표현의 ‘기업’ 자리에 ‘정부’나 ‘언론’, ‘종교단체’를 넣어 보면 어떨지 우리는 대략 직감한다. 기업 쪽의 상대적 호감 지수가 낮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관련 조사가 여럿 있다. 반기업 정서론을 많이 듣게 되는 현실이 어쩌면 기업의 입지가 높아지고 이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번 청와대 모임에 참석한 벤처기업인들은 네이버, 엔씨소프트, 마크로젠, 쿠팡 등의 창업주이거나 대표였다. 시작 단계의 벤처가 아니라 덩치를 상당히 키운 기업의 주역들이다. 각종 규제나 정부 정책의 영향을 점차 받고 있을 법하다. 이를 고려하면 반기업 정서론은 규제나 정책에 대한 불만의 우회적 표현이지 않았을까 싶다.

반기업 정서는 흐릿한 개념이라 오해를 부르기 쉽고, ‘성한 과일’과 ‘상한 과일’을 분리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유령처럼 몽롱한 표현을 쓰기보다는 규제나 정책의 불합리성을 제기하는 방식이 한발씩이라도 나아가는 데 서로 유익할 것 같다. 기업 본래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막연한 반감을 문제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재벌 기업과 특정 가문을 구분해 인식하는 태도를 기업 안팎 모두에서 가져야 하듯 문제 기업(인)을 건강한 기업(인)과 한 덩어리로 여기지 않(게 하)는 노력 또한 양쪽 모두에 필요하다.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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