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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성인지감수성과 두개의 점 / 권김현영

등록 2019-02-12 18:15수정 2019-02-13 11:47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안희정 2심 유죄 판결 이후 성인지감수성이라는 ‘만능 치트키’가 등장해 남성을 모두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었다는 식의 선동이 일부 유력 시사 팟캐스트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마치 성인지감수성을 내세우기만 하면 모든 성범죄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장 안희정 재판만 해도 1심과 2심 재판부는 동일한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성인지감수성을 언급했지만 결과는 판이했다. 어째서였을까?

우선 개념 정의부터 살펴보자. 성인지감수성이란 젠더에 기반해서 배제와 차별이 일어나게 되는 사회적 문화적 요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등장한 성차별적인 표현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그 표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걸 바로 성인지감수성이라고 한다. 노숙인 복지정책의 경우를 보자. 남성 노숙인과 여성 노숙인이 처한 상황과 조건은 매우 다르다. 성인지감수성이 없다면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못해 효과적인 정책을 설계할 수 없다. 공공정책에서 성인지감수성이 점차 중요해지는 이유이고, 성인지감수성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것이 1심과 2심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다. 1심 재판부는 성인지감수성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활용할 능력이 없었고, 2심 재판부는 성인지감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했다. 예를 들어보자. “ㅇㅋ” “바이” “네” “..” “넹?” “자니” “아니욤” “올래?” “주무시다 깨심요?” “ㅇ” “넹?” “..” “담배” “네 담배” “..” “다른 건요” “없다” 1심 재판부가 인용한 텔레그램 대화방의 내용 중 일부다. 보도된 것은 주로 ‘넹?’이었지만(넹?) 쟁점은 두개의 점의 해석론이었다.

피해자는 이 두개의 점을 불쾌함이나 침묵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밤늦게 상사가 “올래?”라는 문자를 보냈을때, 즉각 가겠다고 답하지 않고 주무시다 깨셨냐고 되물었더니 ㅇ이라는 자음 한 글자가 답으로 온 상황이다. 그런데도 알겠다고 하지 않고 “넹?”이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두개의 점(“..”)이 찍혔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이 두개의 점은 무슨 의미일까. 주변 사람들에게 전후맥락과 상황을 설명하고 두개의 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백이면 백, ‘사장 화났네, 덜덜덜’ 이런 반응이었다. 이것이 통상의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담배”라는 말을 쓰기 전에 “..”이라고 쓴 것은 업무지시가 아니라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비서에게 성관계를 제안해보고자 하지만 거절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점을 두개 찍는 도지사의 모습이라도 상상했던 걸까?

성인지감수성은 고사하고, 가해자에게 완전히 빙의하여 점 두개에 내포된 내심의 의사를 대신 읽어주기까지 한 것이다. 1심과 2심 재판부의 판결이 완전히 달랐던 것은 형사법상 증거원칙을 흔들었거나, 피해자 입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1심 재판부가 가해자의 입장을 이 수준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해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일관된 증언뿐만 아니라 주변 정황, 3자 증언의 신뢰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고인’ 증언의 신뢰성과 일관성 여부 등을 종합해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성인지감수성은 2심 재판부가 두개의 점을 해석하는 통상의 상식에 가까워지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만능 치트키는 없다. 상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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