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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빈민의 벗’ 제정구, 역사가 되다

등록 2019-02-12 17:44수정 2019-02-12 19:13

1990년대 중반쯤 고 제정구 의원이 살던 경기도 시흥시 자택을 찾은 일이 있다. 당시에는 기자가 정치인 집을 찾는 일이 흔했다. 그의 집은 여느 국회의원 집과는 달랐다. 슬레이트로 지은 단층집이 여러 줄로 늘어서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집들 중 하나가 ‘빈민운동가’ 제정구의 집이었다.

지난 9일로 제정구가 떠난 지 꼭 20년이 됐다. 1999년 55살의 한창나이에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가짐 없는 큰 자유’란 가훈과 18평짜리 슬레이트 집, 빚 7천만원이 그가 남긴 전부였다. 정치가 혼탁하기 짝이 없는 요즘, 가난한 이들의 영원한 벗, 제정구의 자취가 20년 세월을 넘어 더욱 선명해진다.

제정구의 삶은 1973년 청계천 뚝방 위에서 판자촌을 내려다보는 순간 크게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하며 충격을 받은 그는 곧바로 판자촌으로 거처를 옮기고 야학을 하며 넝마주이, 단무지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다. 운동권 대학생이었지만 밑바닥 삶의 현실도 모르는 채 이방인처럼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일우 신부와의 만남은 그의 빈민운동의 기폭제였다. 판자촌을 찾아 들어온 파란 눈의 38살 신부와 29살 총각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1975년 양평동 판자촌에선 제정구의 신혼집에서 함께 살았다. 1977년 양평동 빈민들을 이끌고 경기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로 옮겨 ‘복음자리’ 마을을 만들었다. 제정구는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을 지켰다.

제정구의 기개는 남달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을 땐 최후진술에서 “제가 죽어 나라가 잘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1995년 디제이(DJ)의 통합민주당 분당 땐 “의미없는 재선, 삼선이 되기보단 차라리 초선으로 전사하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디제이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결별해 만든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엔 노무현이 함께했고,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 등이 뜻을 같이했다. 1997년 대선에서 통추가 디제이와 이회창 지지로 갈릴 때 ‘3김 청산’이란 명분을 택한 것은 그의 정치 행로에서 마지막이자 외로운 결단이었다.

지난 9~10일 그의 고향인 경남 고성에선 20주기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다. 300여명이 참석해 그의 뜻을 기리고 추모 전시회도 열었다. 제정구기념사업회는 전국 단위 추모행사는 이번을 끝으로 마감하기로 했다. 제정구가 역사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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