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요즘 부쩍 문재인 정부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여권에 불리한 대형 악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경제정책에서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아우성이 들끓으면서다. 촛불에 불타 사라졌다고 여겼던 구보수세력이 다시 무덤에서 나와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도 진보정부 위기론의 한 방증으로 거론된다.
사실 현 국면이 정권의 위기 상황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위기는 모든 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내재하며, 위기를 늘 간직하고 사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지지도 하락 등 숫자로 나타나는 지표가 위기의 결정적 증표도 아니다. 오히려 정권이 위기인지 아닌지는 위기론에 대처하는 태도에서 관찰할 수도 있다.
인체 건강의 적신호인 조급증, 초조감, 강박증, 유연성 저하, 신경증 등은 정치의 세계에서도 건강의 척도로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정부에서도 그런 증상이 부쩍 심해졌다. 여유와 차분함, 유연성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과도한 경직성, 신경과민적인 대응이 채우고 있다. 김태우·신재민씨의 폭로 사태, 손혜원 의원 논란, 김경수 경남지사에 대한 법원 판결 등 잇따른 악재에 대처하는 여권의 태도가 그렇다. 물론 억울함과 답답한 심정, 분개하는 마음 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날선 반론과 상대방에 대한 융단폭격 등은 부분적 승리에는 기여할지 몰라도 전체적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면 손실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경제정책에서의 조급증과 강박증세는 더욱 심각하다. 경제지표를 호전시키기 위한 단기적 처방에 뛰어들다 보니 개혁의 대상인 재벌에 매달리고, 각종 사회간접자본 의존 정책으로 회귀하면서 ‘토건공화국의 재현’이라는 탄식까지 나오고 있다. 여권으로서는 다가올 총선을 의식해 일단 개혁정책을 뒷전으로 밀어놓는 게 전략적으로 낫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이 정부의 경제정책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조차 아리송해졌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정권의 정체성 위기이고, 어느 면에서 진정한 위기라 할 수 있다.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현 네덜란드 총리인 마르크 뤼터,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인 람 이매뉴얼 시카고 시장 등이 한 말이다. ‘위기의 낭비’란 말은 “위기는 기회”라는 말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위기는 필연적으로 그동안의 행동에 대한 성찰, 기존의 정책과 실행을 재점검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매뉴얼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이런 조언에 대입해보면 현 정부는 지금 위기를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재인 대통령의 최대 강점은 겸손함과 따뜻함이다. 정권 초기에 문 대통령의 이런 이미지는 곧바로 정부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일이 흐를수록 ‘대통령 이미지 따로, 정부 이미지 따로, 민주당 이미지 따로’ 가고 있다. 겸손함과 따뜻함은 대통령 한 사람의 자산이 아니라 정부·여당 전체의 자산으로 일관되게 자리잡아야 하는데 괴리가 날로 커진다. 위기를 낭비하지 않기 위한 첫번째 실천 항목은 정권 전체가 겸손함과 따뜻함으로 재무장하는 일이다.
정부의 겸손함과 따뜻함이 사라진 것은 적폐청산 작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청산이라는 사안 자체가 그런 단어와는 본질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데다, 적폐청산 작업이 지속되면서 생겨난 국민의 피로감,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보수세력의 공세도 치열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적폐 옹호 기득권 세력에게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한다. 적폐청산이 적대정치의 동의어로 전락하는 비극을 막을 더욱 세심하고 진정성 있는 소통 전략이 절실하다.
이제는 촛불정권임을 스스로 내세우는 태도도 피했으면 한다. 어차피 이 정권이 촛불정권임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 촛불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할 과제다. 지금 잇따르는 개혁정책의 후퇴는 촛불정권이라는 말마저 무색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촛불정부를”이라는 태도는 오히려 반감만 불러올 뿐이다.
현 정부가 임기 안에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돼 있다는 것은 국민이 모두 안다. 이제는 개혁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임기 안에 할 일, 다음 정권을 위해 토대를 닦을 일 등을 정밀히 정리할 시점이다. 가장 난제 중의 난제인 경제 문제에서도 ‘담대할 정도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정권의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할수록 더욱 심화된다. 위기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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