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시대가 끝난 상황에서는 경제·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응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도 고용문제에 대한 해법이랍시고 정부는 감옥에 있어야 할 재벌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환대를 베풀고, 시대착오적인 대규모 토건사업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녹색평론> 발행인 촛불혁명으로 근 10년 만에 다시 태어난 민주정권이 침로를 잃고 비틀거리고 있다. 이러다가 이 정권도 이전의 민주정권들처럼 실패하고 마는 게 아닐까. 왜 민초들의 고통과 희생과 피눈물로 세워진 민주정권들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해버리는 걸까. 이런 식으로 가서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솔직히, 나는 문재인 정부에 관해 이런 쓰라린 이야기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때 민중의 힘으로 민주정권이 탄생했다는 게 너무도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세계 곳곳에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위신이 추락하면서 권위주의적 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 기류 속에서 다수의 한국인들은 예외적으로 민주주의의 재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기쁨은 더 컸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의 출발은 매우 쾌적했다. 남북의 적대관계를 영구화함으로써 정략적인 이익을 취하려고만 해온 수구세력과는 정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인 노력을 쏟았고,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큰 역사적 공적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문제 이외의 국내 정치와 경제·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접근방식이나 정책은 무슨 까닭인지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선거제도 개혁을 둘러싸고 지금 집권 민주당이 보여주는, 좋게 말해서 매우 소극적인, 나쁘게 말하면 매우 치졸한 행태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 의사당은 민의의 대변자들이 진지하게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라고 말할 수가 없다. 지금 한국의 국회는 그냥 자신들의 개인적 출세와 성공, 그리고 소속 정파나 계급의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돼 있는 협잡꾼들의 집합소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국회의 이런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60년 4·19혁명 전야에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앞 계단에 홀로 서서 “국회의원 두 개 십원!”이라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던 젊은 시인이 있었다. 그는 오래전 작고한 ‘민족시인’ 신동엽이었다. 나는 요즘도 태평로나 광화문 네거리를 지날 때 가끔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때가 있는데, 물론 이것은 그 이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국회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회가 이 꼴인 한, 우리가 ‘헬조선’을 탈출하는 것은 물론, 기후변화를 비롯한 온갖 엄중한 위기를 헤쳐 나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도 국회였다. 촛불혁명은 입법부의 재편까지는 이루어내지 못했고, 그 때문에 적잖은 의석을 가진 수구세력이 집요하게 민주정부의 발목을 잡을 것임은 예상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집권당인 민주당 자신이 민주주의 원칙을 스스로 허물면서 민중을 배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 민주당은 제1야당의 시대착오적 행태로 볼 때 다음 총선에서는 압도적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낙관하기 때문에 현행의 지역구 중심 선거제도를 고수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한없이 꾸물거리다가 여론의 압력에 밀려 엊그제서야 내놓은 그들의 공식적인 개정안은 국회의원 정원 300석을 변경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다. 현재의 지역구 의석 중 50개 이상의 감축이 전제돼 있는 이 개정안은 현실성이 조금도 없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민주당은 여론 때문에 선거법 개정에 임하는 척하지만, 내심으로는 선거법을 고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집권 민주당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세력으로 자처해왔고, 일반 시민들도 대체로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므로 그들이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적어도 한국의 공식적 정치공간에서 민주주의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싫든 좋든 현재의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민주당 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 민주당이 지금 잔꾀를 부리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조금이나마 질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키려 하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문재인 정권이 남북문제를 아무리 잘 풀어내더라도 조만간 경제문제라는 벽에 부딪힐 것임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 구축 프로세스가 느려지면서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내려가자, 정부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것저것 상투적인 대책들을 서둘러 내놓는 것을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아니, 나 같은 아둔한 서생도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을 정부가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정부라는 거대한 국가운영시스템에는 온갖 전문가와 유식자들의 참여로 경제문제를 풀어갈 치밀한 시나리오가 마련돼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냥 막연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의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재인 정권의 최대 문제점은, 경제성장 시대가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경제 정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을 포함한 외국에서는 많은 식자들이 지적해왔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이 문제를 논증하는 책이 <수축사회>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한 증권분석 전문가가 쓴 이 책에 따르면, 성장시대가 끝나고 ‘수축사회’가 시작된 주요 원인은 인구감소, 공급과잉, 상환 불가능한 규모로 커진 부채 등등인데, 수축경제는 앞으로 대략 50년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의미의 경제학적 요인을 떠나서, 지구의 생물물리학적 한계 때문에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벌써 수십년 전부터 생태적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따져보면, 지금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전역에 걸쳐 발생하고 있는 숱한 재난과 고통과 비극은 근본적으로 정치가, 관료, 언론, 학자, 그리고 소위 경제전문가들이 성장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성장시대가 끝난 상황에서는 경제·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응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도 고용문제에 대한 해법이랍시고 정부는 감옥에 있어야 할 재벌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환대를 베풀고, 시대착오적인 대규모 토건사업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멀쩡한 광화문광장을 뜯어고치려고 하는 서울시의 사고방식도 다를 게 없다. 이미 과잉 개발로 온 국토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뒷감당을 누가 하라고 이러는 것일까. 끝없는 팽창을 지향하는 성장경제는 생태계 파괴와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없이는 단 하루도 돌아가지 못하는 야만적인 시스템이다. 민주정부의 성공은 이 파괴와 희생의 구조에 얼마나 지혜롭게 맞서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문재인 정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익한 헛발질을 거듭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본의 탐욕에 포섭되어, 결과적으로 민초들의 삶을 절망적 상황에 빠트려놓을지 모른다. 마치 1994년 인종주의 정권을 종식시키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민주정부를 구성했던 넬슨 만델라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글로벌 자본과 ‘주류 경제학자들’에 포위됨으로써 끝내는 흑인 민중의 삶을 더욱 절망에 빠트린 것처럼 말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에 필요한 것은 성장 논리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민초들의 삶의 궁극적 근거, 즉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살리는 방향으로 급진적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리고 지역경제와 문화의 재생에는 소농을 장려하고 에너지 자급 능력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것이 첫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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