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경제 에디터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재계 총수들을 만났다. 청와대 ‘호프 데이’ 미팅 이후 두번째다. 1년6개월 전, 첫 만남 때는 이랬다. “경력단절여성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2·3차 협력업체와도 공정거래 조항을 만들겠다.” “원전 중단으로 인한 타격은 해외 진출로 모색하겠다.” “상시업무직 850명을 정규직화하겠다.” 대통령의 일자리·투자 요청에 재계 총수들은 “상생과 협력”으로 일제히 화답했다. 언론들은 ‘더불어 잘사는 경제, 재계와의 건배’ 따위의 제목을 1면에 달았다. 두번째 만남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개인정보 규제를 풀어달라.”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을 재개해달라.” “정부가 규제 필요성을 입증 못 하면 자동 폐지하라.” “최저임금을 지역·업종별로 차등 적용해달라.” 대통령의 같은 요청에 재계는 약속이나 한 듯 크고 작은 민원을 쏟아냈다. 사회를 본 박용만 상의 회장의 ‘개별적 소원수리는 자제’ 요청은 머쓱해졌다. 정권 눈치 보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타락한 권력과의 검은 뒷거래가 남긴 상처도 스스로 치유한 듯했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장면은 문 대통령과 이재용·최태원 회장의 ‘산책 대화’였다. 재미있게 번역기를 돌려보자. “요즘 반도체 경기가 안 좋다는데 어떻습니까?”(너희들까지 힘들어지면 곤란한데…) “좋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죠.”(우리가 어려워지면 님이 더 힘들걸? 근데 이 정도는 거뜬해요) “삼성이 이런 소리 하는 게 제일 무섭습니다.”(부심 쩌네~) “이런, 영업 비밀을 말해버렸네.”(너랑 나는 급이 다르잖아)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가격이 좋았던 시절이 이제 조정을 받는 겁니다.”(님, 너무 쫄지 마세요) 반도체 경영에 대한 두 총수의 자신감과 함께 ‘우린 이 정도야’라는 자부심도 읽힌다. 맞는 말이다.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이 연일 ‘이젠 반도체마저 위험하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두 총수 말처럼 그리 걱정해주지 않아도 된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50%를 웃돌았고, 올해도 30%대 안팎이 예상된다. 최근 2년간 슈퍼 호황이 끝나고 있지만 일반 제조업체들이 누릴 수 없는 경이적인 이익률이다. 두 업체는 글로벌 시장에서 독과점적인 가격 협상력을 갖고 있다. 수요와 공급 양쪽에서 이익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문 대통령과 재계 총수의 두번째 회동이 지닌 ‘정치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 대통령은 “기업들의 현장 이야기를 경청하라”며 부처 수장과 참모들을 연일 채근하고, 스스로도 경제 관련 행사로 연초 일정을 가득 채우며 솔선수범하고 있다. 새 경제 사령탑과 참모진, 심지어 비서실장까지 ‘경제통’ 브랜드로 포장하며 경제 성과 내기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업이든 가계든, 그리고 정부 스스로든, 모든 경제 주체가 활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건 대통령의 책무다. 걱정되는 건, 이 정부의 개혁 과제다. ‘촛불 민심’은 1순위가 검찰 개혁, 2순위가 재벌 개혁이었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사법 권력인 검찰은 전직 대통령은 물론 사법부 수장까지 감옥에 넣겠다며 ‘거악 척결’의 칼을 열심히 휘두르고 있다. 경제 권력인 재벌 대기업은 국정농단 세력과의 공모로 잠시 고초를 겪었을 뿐, 또다시 ‘경제위기론’에 기대어 민생을 구할 전도사로 나서겠다고 한다. 검찰·재벌 권력 개혁이 과연 설 자리가 있을까? 문 대통령이 조만간 노동계와도 만난다고 하는데, 바람이 하나 있다. 재계 총수들과의 산책 대화 때처럼 “열린 마음”으로 이들의 이야기도 경청했으면 좋겠다.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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