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다. 다양한 주체가 어떤 지향점을 갖느냐에 따라 생각의 충돌이 일어나고, 그 갈등은 특정 기간에 집중돼 폭발하는 양상을 띤다. 역사의 흐름에 발맞춰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이 기간을 ‘시대의 담론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시대의 담론기는 대략 20년마다 5년 정도씩 되풀이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들 시기를 살펴보면 당시의 핵심 과제와 주체들의 고민, 담론 및 행위의 결과와 관련한 역사의 굴곡 등 지금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이 드러난다. 3·1혁명(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 3·1혁명 100돌을 맞은 현재의 과제와 해법 또한 그 속에서 다시 조명할 수 있다.
■ 우리나라 근대의 시작은 서세동점 흐름이 거세지면서 체제 변화의 필요성이 커진 19세기 중후반으로 잡는 게 보통이다. 이후 1880년부터 85년까지 첫 시대의 담론기가 나타난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권 주도 세력이 개화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 때부터,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청과 일본이 톈진조약을 체결한 시점까지다. 핵심 주제는 개화의 당위성과 방법론이다.
담론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첫째는 개화세력과 위정척사파 사이의 갈등이다. 조선은 첫 통상조약인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1876년 체결한 뒤 관계를 확대하기 위한 수신사를 일본에 보낸다.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1880년 9월 중국 외교관 황준헌(황쭌셴)의 <조선책략>과 계몽운동가 정관응(정관잉)의 <이언>을 갖고 돌아온다. 조선책략의 핵심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일본과 맺으며(결일본) 미국과 연계(연미국)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언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유생들은 유례없이 거세게 반발한다. 이들은 11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과격한 상소를 잇달아 올린다. 전국 유생이 참여하는 연대투쟁의 계기가 된 영남만인소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집권세력의 퇴진까지 요구한다. 이 글은 ‘오랑캐의 종자는 성질이 탐욕스러움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며 서양과 일본 세력의 배척을 주장한다.
조정은 이런 척사운동을 막으려고 애쓴다. 그러던 중 1881년 8월 고종을 폐하고 대원군을 다시 집권시키려는 쿠데타 모의가 발각된다. 이를 계기로 조정이 척사운동과 대원군 측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논쟁은 유생들의 패배와 개화론의 승리로 끝난다. 고종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하고(80년 12월), 조미조약과 조영조약(82년 4월), 조불·조독조약(82년 6월)을 잇달아 체결한다. 대원군 집권기에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도 82년 5월 모두 철거한다.
■ 둘째는 개화파 사이의 논쟁이다. 계기는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과 임오군란이다. 조선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려고 청에 중재를 요청하고 영선사 김윤식을 보낸다. 청은 미국과의 교섭에 나서면서 제1조에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다’라는 내용을 집어넣으려 한다. 조선이 반대하자 타협이 이뤄진다. 조약문에는 속방이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되,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는 내용의 조회문을 보낸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자주권을 인정하던 청의 이전 정책과 다른 것으로, 조선은 이때부터 10여년 동안 청의 속방이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주권국임을 주장하는 반쪽 주권 상태에 있게 된다. 이른바 양절 체제다. 급진개화파는 이에 분개한다.
82년 6월 구식 군인들과 민중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조선의 요청을 받은 청이 군함 세척과 3000명의 병력을 보내 군란은 한달여 만에 일단락된다. 군란으로 개화정책이 중단되고 대원군은 중국 톈진으로 끌려간다. 양절 체제가 결국 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강화한 것이다. 이때부터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는 상종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나빠진다.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 온건개화파는 청과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고 한다. 반면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급진개화파는 대청 사대 외교를 청산하고 일본을 모델로 삼아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사상과 제도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화의 목표와 방법을 둘러싼 갈등에 더해 이때부터 친청파와 친일파가 확실하게 나뉜다. 이 논쟁은 성격상 당장 승패가 가려지기 어려우나 명분으로는 급진개화파 쪽에 더 힘이 있었다.
■ 셋째는 권력을 쥔 민비 척족과 급진개화파 사이의 대립이다. 핵심은 부국강병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정과 군대 문제다. 민씨 세력은 재정난 타개를 위해 화폐의 명목가치를 올리는 당오전의 발행을 추진하지만 김옥균은 일본에서 외채를 도입하자고 한다. 중간에 낀 고종은 둘 다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1883년 2월 발행된 당오전은 1894년까지 유통되나 인플레를 일으킨데다 위조 통화까지 유발해 애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고종의 위임장을 들고 83년 일본으로 간 김옥균도 차관 도입에 실패한다.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은 박영효는 이해에 한성판윤에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광주 유수로 좌천된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한다. 경기도 광주는 남한산성을 끼고 있어 병력을 훈련하기에 좋은 곳이다. 박영효는 1천명에 가까운 병력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이를 위험하게 여긴 민씨 세력은 박영효를 파직하고 그 군대 역시 중앙의 군대에 편입한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왕당파의 주축이기도 하다)에 대한 급진개화파의 패배다.
■ 넷째는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실패와 이후 처리 과정이다. 일본의 협력 아래 이뤄진 갑신정변은 자주독립국, 신분제 폐지, 정부 조직의 근대적 개혁, 탐관오리 숙청 등 혁명적 정책을 내세우지만 청의 무력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난다. 청으로선 자신이 내세운 ‘조선 속방론’을 관철한 사례다.
정변 실패로 급진개화파는 물론 온건개화파도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러면서 조선의 주권과 조정의 역량 자체가 취약해져 외세에 의한 이권 침탈이 시작된다. 권력을 장악한 민씨 세력의 전횡 역시 심해진다.
정변 직후인 85년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두 나라가 4개월을 기한으로 조선에서 동시에 군대를 철수하며, 앞으로 조선에 변란이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사태가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이 두 나라 사이의 완충 지역으로 설정된 셈이다.
■ 이 시기의 담론에 개화를 앞세우는 세력이 모두 주역으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개화파의 성패와 무관하게 개화라는 도도한 물결이 형성된 모양새다. 이때 형성된 ‘갑신정변 세대’는 이후 한 세대 동안 역사의 한 축을 이룬다.
고종 또한 대체로 개화를 지향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이 조선에 외교 고문으로 보낸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부인은 갑신정변 이전 상황과 관련해 ‘묄렌도르프와 민씨 명성은 가라앉아 있었고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친일파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급진개화파의 자신감과 초조함이 함께 드러난 갑신정변의 실패로 정치세력으로서 개화파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이런 상황은 이후 10년 동안 이어진다. 개화파에 대한 인식도 크게 나빠진다. 정변 당시 서울 백성들은 개화파를 역적으로 공격한다. 이후 민씨 세력의 지배 아래 ‘어쩔 수 없는 온건한 개화’가 시도되지만,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에는 그다지 다가가지 못한다. 게다가 기존 체제조차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민중의 고통은 더 심해지는 상황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까지 계속된다. 조선에 대한 발언권을 둘러싸고 중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일본 등 열강 사이에 형성된 교착상태도 그때까지 이어진다. 1880대 초반의 담론과 그 결과가 이후 10년을 규정한 것이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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