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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도망치세요!” / 신윤동욱

등록 2019-01-08 17:59수정 2019-01-09 13:21

신윤동욱
사회정책팀장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싶은 일들이 정말로 중요한 일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다. 무언가 사고가 터지고, 누군가 목숨을 잃고 나서야 그 대책의 절실함을 깨닫는 일이 반복된다. 지난 한달 사이 김용균과 임세원을 잃고서야 한국 사회는 뒤늦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시간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고의 공통점 하나를 꼽자면 일하다 당한 산재란 것이다.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에게 컨베이어벨트가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었다면, 정신과 전문의 임세원씨에게는 세상이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였던 셈이다. 유가족이 호소한 대로 정신질환을 편견 없이 제때 치료받을 사회적 환경이었다면 ‘위험이 집중된 순간’이 줄어 사고 위험도 현저히 줄었을 것이다. 사회적 편견과 정책의 부재로 정신질환의 ‘완전한 치료’가 어려운 사회에서 ‘안전한 진료’를 보장받지 못해 생긴 일이다.

의사 임세원씨는 예약도 없이 찾아온, 1년 만에 와서 병세가 너무 궁금했을 환자를 진료시간을 넘겨 기꺼이 만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컨베이어벨트를 멈춰줄 동료, 흉기를 막아줄 장치는 그들 곁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 그런 사람을 보호하라고 국가는 존재하지만 가장 절실한 순간에 작동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진 말아야겠군…’ 각자도생 사회에서 익힌 속물근성이 발동해 이런 상념까지 스친다. “도망치세요!” 임세원씨가 흉기에 쫓기면서도 다른 동료들을 위해 외쳤다는 한마디는 각자도생 사회를 향한 경고 같다.

김용균씨 유가족의 처절한 호소가 없었다면 산업안전보건법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정부안으로 발의된 지 한참 지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경제논리에 막혀 국회 논의 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젊은 목숨의 희생을 겪고서야, 어머니가 국회를 지키며 호소하고서야 여야는 개정안 통과에 가까스로 합의했다.

그러나 여전히 김용균씨가 일한 화력발전소 업무는 개정안에서도 ‘위험한 작업의 도급 금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에도 김용균씨의 동료들은 오늘도 하청노동자로 살아간다. 마음이 아픈 이들을 병원 안팎에서 돌볼 능력이 없는 사회에서 또다른 임세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진료를 계속해야 한다. 이런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의 무한질주를 멈추자고 노동정책이 나왔고, 복지정책이 생겼다.

주 52시간 초과 근로 금지, 최저임금 8350원, 이 무심한 숫자 하나하나가 사람 한명 한명의 목숨과 무관하지 않다. 악마는 자주 디테일에 있지만, 탄력근로제·주휴수당 같은 디테일의 악마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면 본질을 잊기도 쉽다.

주 52시간 초과 근로 금지는 ‘저녁이 있는 삶’뿐 아니라 누군가에겐 ‘과로사당하지 않는 삶’이란 사회적 약속을 뜻한다. 최저임금 8350원이 최저선의 삶을 누릴 수입을 뜻하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그런 노동자가 적게는 300만명, 많게는 500만명이다. 대단한 진보가 아니다. 52시간과 8350원은 과노동과 저임금의 비인간적 제도에 기반해 성장해온 한국 사회가 이제는 전근대와 결별하자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저 컨베이어벨트가 우리를 덮치기 전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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