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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지나간 세기에의 미련

등록 2018-12-27 17:55수정 2019-10-17 16:29

20세기의 역사는 풍성하면서 복잡했다. 새로운 시대가 앞 세기로부터 받은 선물이 무엇일까 짚어보면서 주목한 지난 세기의 정신적 유산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 인류의 발전을 위한 협력, 미래를 향한 기획 등 세 가지였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1914년에서 시작하여 1990년에 끝난 ‘짧은 세기’로 규정한다. 마르크시즘 학자답게 제국주의의 모순으로 ‘벨 에포크’가 파탄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고 그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을 이룬 시기에 20세기가 마감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도 그 시기에는 동의하면서도, 세계가 새로운 과학의 시대로 전환하면서 어쩌면 그 영향으로 소련 체제의 붕괴까지 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세기 전환기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이 시기에 인터넷의 개발과 게놈 연구로 과학기술의 진전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져 문명의 발전과 지향이 디지털과 생명공학 쪽으로 비약한다. 홉스봄은 19세기를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의 1910년대까지 130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20세기는 ‘긴 19세기’보다 50년이 짧다.

그 짧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역사는 풍성하면서 복잡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세 차례의 국제전적 내전이 벌어졌으며, 거대 이념을 추구하는 소련과 중국의 체제혁명, 대규모의 기아와 공황이 일어나고, 선·후진 사회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연필과 종이로 상대성 이론을 계산하면서 원자탄을 제조한 인간들은 마침내 우주여행의 첫걸음으로 달을 밟았다. 인공두뇌가 발명되고 생명 디자인이 가능해졌고 가상현실이 만들어졌다. 피터 왓슨의 각 권 1300쪽에 이르는 두 권짜리 <생각의 역사>(남경태 옮김)의 첫 권은 5만년 전의 말의 사용부터 19세기까지의 인간 지식 발전의 역사를 서술하지만 제2권은 1900년대 한 세기 동안의 발전에 할당했다. 100년으로 5만년의 역사와 맞짱 뜨는 뜨거운 ‘압축 성장’의 20세기는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받아야 했던 전반기의 고통을 보상하듯 후반기는 ‘인류사의 낭만 시대’로 평가받을 만큼 희망에 찼다. 자원 규모와 세계 인구 간에 균형잡힌 지속가능한 시대로 평가되었고, 세계의 반 가까운 나라들이 식민 착취로부터 해방을 얻었으며 큰 전쟁은 없었다. 이렇게 20세기는 홉스봄이 이른 바의 ‘극단의 시대’였다. 온전한 20세기적 인물인 사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그 공포 속에서도 그렇게 평화롭게,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생각의 역사 Ⅱ>)이라고 회고했다.

벌린보다 30년 늦게 태어나 어쩌면 그의 나이만큼 살게 될 수도 있을 나도 그의 고백에 공감하는 것은 생애의 8할이 속한 20세기 동안 내 또래가 겪어온 삶이 그 비슷하게 기구한 곡선을 그은 때문이다. 일제 말기에 태어나 해방되던 해 초등학교 첫 학년에 일본말과 우리말을 잇달아 배운 나의 세대는 분단과 6·25전쟁, 남북 대치와 반공주의, 4·19와 5·16, 유신과 민주, 5·18과 6·29의 잇단 대결과 갈등에 속박당하면서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의 역동적인 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역사의 무게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선진 반열에 오르며 민족주의에서 세계주의로 미끄러져 옮아가는 세태에 적응했다. 생애 대부분을 이처럼 20세기 토양에 적시며 살아왔기에 나는 컴퓨터며 스마트 문명이 지닌 풍요와 편의를 즐기면서도 전날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워드로 글을 쓰고 메일로 소식을 전하면서도 여전히 종이책을 읽고 신문을 읽으며 에스엔에스는 못 보는 이중 문명의 복합성으로 내 감수성을 유지한다. 물론 새 문명을 맛볼 기회를 얻은 행운을 고마워하면서도 그 때문에 기억해두어야 할 새로운 방식에는 여전히 미숙하고 어벙해서 구식의 방법이 아쉬워진다. 60년대의 서울이었던 광화문 거리를 그리워하듯 전 시대의 볼펜문화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새 세기로 들면서 나는 ‘21세기가 물려받은 것’이란 힘겨운 문제를 가벼운 소감으로 쓴 적이 있다. 새로운 시대가 앞 세기로부터 받은 선물이 무엇일까 짚어보면서 주목한 지난 세기의 정신적 유산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 인류의 발전을 위한 협력, 미래를 향한 기획 등 세 가지였다. 첫번째 평가는 인간과 인간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 공감과 평등을 향한 노력에 대한 감사이다. 원주민 착취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식민 국가들의 해방, 유색인종들의 형평주의, 이념과 종교로부터의 자유, 여성과 성소수자의 인정, 약자와 소수파의 권리 존중 등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뜨거운 인식들이 범세계적인 민권운동으로 보편화하며 실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류의 자각을 보여준다.

20세기의 두번째 선물은 이러한 인류의 불평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공동으로 마주치는 위기에 대항하는 국가 간, 시민사회들 간의 연대였다. 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맹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은 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합은 국제적 지역적 분쟁 해결에 노력하면서 유네스코를 통해 교육, 환경과 문화 보존을 위해 공동 협력한다. 유럽연합이 실현되고 국제적십자사, 올림픽위원회 같은 범세계적 기구로부터 ‘그린피스’ ‘국경없는의사회’ 등 시민연대에 이르는 비정부 간의 숱한 조직들은 서로 겯고 도우며 세상을 좀더 살 만한 자리로 만드는 데 협력한다. 인류사에서 처음 보는 국제 간의 멋진 연대다.

세번째 지혜는 미래를 향한 기획과 그 의지의 실천이다. 레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시작된 미래의 전략적 기획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거니와 국가 간, 지역 간, 분야 간의 미래 발전을 향한 노력의 예를 보여주었다. 미래는 오는 대로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지로 변용시켜야 할 가능성의 시간이며 예측과 계획, 실천으로 구현되는 미래다. 이는 5년, 10년 혹은 30년이란 자연의 시간을 인간이 조작할 인간의 시간으로 주체화하여 실천함으로써 목표에 다다르는 시간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운명론으로부터의 극복이며 해방이다.

앞 세기가 만들어준 인류사적 덕성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두 10년대는 오히려 참담했다. 전대미문의 9·11 테러로 새로운 세기의 문을 연 이후 세계는 크고 작은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지역적 충돌로 시끄럽고, 방자한 ‘아메리카 퍼스트’와 영국의 브렉시트, 극우 보수주의의 부활, 기후조약 등 미래를 위한 기획의 유예, 취업이민과 난민들 앞에 세운 살벌한 차단벽 등에서 아름다운 휴머니즘의 파열음이 잇달아 터지고 있다. 과학은 특이점으로 달리는데 정치는 사납게 서로 부딪고, 지성은 자유로운데 이해관계는 폭력적이다. 20세기 지식인들이 품었던 ‘신념의 존중’은 21세기의 ‘타산의 기술’로 타락하고 우애는 혐오로 반전되었다. 문명은 발전하고 생활은 편해지고 부는 풍족해졌지만 디지털 세대의 내면은 각박하고 상대적 빈곤감은 더 심각해지며 격차들은 더욱 벌어진다. 아, 세월호와, 잇따르는 젊은 생명들의 무참한 희생들! 19세기의 토크빌이 한 “문명은 기적을 낳지만 문명인은 거의 야만인으로 돌아간다”란 말은 21세기의 이제 와서 오히려 실감나고 있다.

최정호 박사의 ‘미래학회 50년, 대한민국 100년’ 기념사는 두 세대 동안의 대한민국 역사를 ‘미래가 기승을 떨던 1960~70년대’ ‘현재가 기승 부린 1980~90년대’ ‘과거가 기승 부린 2000년대’로 회고하면서 존 맥헤일의 한마디를 옮긴다. “과거의 미래는 미래에 있고/ 현재의 미래는 과거에 있고/ 미래의 미래는 현재에 있다.” 모든 미래는 미래와 과거, 현재에 분점되고, 인류사의 책임과 가능성은 그 모두에 서로 얽혀 상호 의존의 인과를 이룬다는 뜻일 게다. 그것이 자연으로 태어난 아날로그의 두뇌로 아마도 인류사에서 최상의 지혜를 쌓아올린 지난 세기에의 미련을 내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어차피 산수(傘壽)의 구세대, 세밑의 늙고 낡은 정서가 문득 거창하면서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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