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지난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입장 발표 및 향후 활동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다중노출 촬영)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손자병법> 제11편은 ‘아홉 가지 땅의 형세’(九地)를 들어 병법 운용의 원칙을 설명한다. 전쟁을 일으켰으나 자기 땅에 머물고 있는 경우는 ‘산지’(散地), 적의 땅에 들어갔으나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경지’(輕地)다. 적이든 아군이든 어느 쪽이 점령해도 이익인 경우는 ‘쟁지’(爭地), 나도 갈 수 있고 적도 올 수 있는 경우는 ‘교지’(交地)다. 세 나라가 땅을 접하고 있는 경우는 ‘구지’(衢地), 적의 땅에 깊숙하게 들어간 경우는 ‘중지’(重地)다. 산림이나 험준한 곳, 습지 등으로 행군하기 어려운 경우는 ‘비지’(?地), 입구가 좁고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경우는 ‘위지’(圍地)다. 마지막이 바로 ‘사지’(死地)다. “속히 싸우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으면 곧 죽는 경우”(疾戰則存, 不疾戰則亡者)다.
‘산지’면 싸워선 안 된다. ‘경지’면 멈추지 않는다. ‘쟁지’면 공격하지 않는다. ‘교지’면 끊어져선 안 된다. ‘구지’면 외교를 잘해야 한다. ‘중지’면 약탈한다. ‘비지’면 신속히 통과한다. ‘위지’면 계략을 써야 한다. ‘사지’라면? 오직 싸우는 것(戰)뿐이다. 죽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손자병법>은 “병사들을 교묘하게 ‘사지’에 던져놓고 필사적으로 싸우게 만드는 일”(愚兵投險)이야말로 병법의 본질이라 말한다.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아야만 전쟁이라는 거대한 죽음의 맷돌이 돌아간다는, 비정한 이야기다.
전쟁터가 아닌 일터가 ‘사지’가 되어버린 현실은 어쩔 것인가. 발전소에서 일하던 스물네살 청년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제껏 벌어져온 수많은 ‘일터에서의 죽음’들이 그의 죽음 위에 겹쳐져 있어, 그 시신의 무게가 더욱 무겁다. 자본이 구사하는 ‘외주화’라는 용병술은 약한 사람들을 더욱 매몰차게 ‘사지’로 내몬다. 지난 5년 동안 5개 발전사에서 발생한 안전사고 346건 가운데 97%가 하청노동자 업무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조선·철강·자동차·화학 등 51개 원청사에서 노동자 1만명당 산재로 숨진 사내하청 노동자 수(0.39명)가 원청(0.05명)보다 8배 높았다는 실태조사 결과도 있었다. ‘사지’라면, 싸워야 한다. 속히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죽는다.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죽음을 외주화하는 용병술 그 자체와 싸워야 한다. 원청의 책임을 명확히 묻고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 그 싸움의 시작이다.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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