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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의 수채화 포비아 극복기 / 이명석

등록 2018-11-30 18:06수정 2018-12-01 13:04

이명석
문화비평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고,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이란 데를 다녀본 적이 없다. 딱 한번 예외가 있었는데, 아홉살 무렵이었다. 옆집의 미야라는 아이가 미술학원에 다닌다고 그렇게 자랑을 했다. 누나와 나는 엄마를 졸랐다. “제발 한번만 보내줘.” 일주일 뒤에야 허락이 떨어졌다. 학원에서 뭘 배웠는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달 뒤에 엄마가 했던 말은 또렷하다. “한달 다녔으니 됐지?” 그 말의 무게는 엄청났다. 나는 작은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누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그림을 잘 그렸다. 연말이면 카드 종이를 잔뜩 사와서 꼼지락댔다. 붓을 몇 번 움직이면 동화 마을이 나타났고, 칫솔로 하얀 물감을 뿌리면 눈의 나라로 바뀌었다. 당연히 미대에 가면 좋았으련만, 우리 집은 가난한데다 실용적이어서 취직 잘되는 학과로 갔다. 누나는 대학을 나와 컴퓨터학원을 차렸다. 학원에 돈을 쓰는 건 안 되지만, 학원으로 돈을 버는 건 괜찮았다.

나는 누나보다는 못했지만, 미술은 웬만큼 했다. 하지만 유독 수채화가 약했다. 붓에 물감을 묻혀 한번 칠하면 색이 엉뚱한 데로 번졌다. 두번 칠하면 물 묻은 종이가 휘어졌다. 세번 칠하니 종이가 지우개 똥처럼 벗겨졌다. 네번째는 집에 가서 해야지. 스케치북을 펴니 앞뒤가 달라붙어 찢어졌다. 나중에 미대 출신들에게 위로의 말을 듣긴 했다. 원래 수채화가 어렵다고, 싸구려 재료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내겐 꽁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이게 다 학원을 한달밖에 안 다녀서야.

그런 내게 40년 만에 기회가 왔다. 뉴욕의 저명한 예술학교에서 수채화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서울에서 여는 워크숍에 뽑힌 거다. 그 학교에 수채화 담당이 셋 있는데, 선생님은 본인이 제일 쉽게 잘 가르친다고 하셨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배운 방법을 다 잊어먹으라고 하셨다. “선생님, 여기 최적의 교보재가 있습니다. 제가 바로 인간 백지입니다.” 그래서 나는 40년 전의 한을 떨치고, 수채화 능력자로 거듭나고 있을까? 현재까지의 결과만 놓고 말하면, 나는 선생님의 지적질 지분 1위를 담당하고 있다. 왜 내 그림만 보면 그렇게 할 말이 많으실까? 선생님은 말한다. “물이 흐르면 마음이 평화로워지죠.” 나는 꿈속에서도 제멋대로 번지는 물감과 싸우느라 버둥댄다.

돌이켜보니 내 취미의 연대기는 어릴 때의 한풀이다. “강 쪽으론 절대 가지 마.” 동네 아이가 강에 빠져 죽은 뒤로는 물에 들어갈 생각을 못 했고, 서른살이 넘어 겨우 수영을 배웠다. “기타는 배워서 뭐 하게? 딴말 말고 운전이나 배워.” 대입 합격통지서를 받고 기타학원 이야기를 꺼냈다가 들은 말이다. 나는 아직도 운전면허가 없고, 대신 플라멩코 기타를 배웠다. “뼈다귀가 춰도 너보다 낫겠다.” 중학교 소풍에서 막춤을 추니까 친구들이 한 말이다. 스윙댄스는 내가 가장 깊이 빠진 취미다. 뒤늦게 배우니 허우적거리고 뒤뚱거렸다. 남들 앞에서 지적당하는 일은 창피했다. 하지만 차차 깨달았다. 못하면 선생님 눈에 뜨여야 한다. 그래서 코치받으면 그게 돈 버는 거다.

대한민국 어디든 학원이 넘친다. 아이들은 피아노, 웅변, 태권도, 퐁당퐁당 뛰어서 순례를 한다. 나는 이제 약 올라 하지 않는다. 지금 나도 물감, 팔레트, 물통을 들고 그들 옆을 지나고 있으니. 공원의 공유 공간에서 화초를 그리면 옆에서 숙제하던 아이들이 훔쳐본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겠지? “아저씨, 정말 못 그리네요.” 하지만 괜찮다. 오늘보다 내일 더 잘 그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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