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서울에서 가장 어수선한 동네는 영등포역 일대가 아닐까. 경부선 철로와 고가도로가 뒤엉켜 있고, 소규모 공장들과 쪽방촌, 홍등가, 청과물시장도 뒤섞여 있다. 이 정신없는 도시 조직 곳곳에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이 공존하고, 복합쇼핑몰과 백화점이 새로 들어섰다. 걷고 싶지 않은 환경임은 말할 것도 없고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더라도 운전하기 어렵다. 복잡한 풍경 한가운데 삼각형의 공장 터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80년 가까이 밀가루를 생산하고 2013년 아산으로 이전한 후 가동을 멈춘 대선제분 영등포공장 터다. 사일로, 정미 공장, 대형 창고, 목재 창고 등 23동의 건물이 남아 있는 약 2만㎡의 대선제분 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도시재생 구상안이 얼마 전 발표됐다. 서울시의 첫번째 ‘민간 주도형’ 도시재생 사업이다. 대선제분 창업자의 후손인 시행자가 사업비 전액을 부담해 재생 계획 수립, 리모델링, 준공 후 운영 전체를 주도해 진행한다. 민간 사업자는 경제적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수익 공간을 조성하고, 서울시는 공공성 확보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보행·가로 환경 등 주변 인프라를 정비하는 방식이다. 최근 정부와 전국의 지자체들이 광속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관 주도 도시재생이 아니라 민간 주도형 재생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더 중요한 초점은 1936년에 지은 공장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한 채 재활용과 보강을 통해 부지의 기억과 장소성을 살리기로 한 계획 개념이다. 공장과 창고를 알뜰하게 고쳐 전시장, 공연장, 박물관, 식당과 카페, 공유 오피스 등이 복합된 문화시설로 재창조한다는 구상이다. 물론 새로운 실험은 아니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지구 전역의 많은 도시에 이미 오래전부터 공장을 비롯한 근대 산업시설들이 폐기되고 방치됐다. 이런 골칫거리 땅을 전면 재개발하기보다는 재사용해 쇠락한 도시의 지역 경제와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수명이 다한 공장, 창고, 항만, 철로 등을 20세기 발전을 이끈 ‘산업유산’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낯설지 않다. 대형 제철소를 재활용한 ‘뒤스부르크-노르트 환경공원’은 쇠퇴 도시의 재생 거점이 됐다.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한 런던의 ‘테이트 모던’, 맥주 양조장에서 ‘힙’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베를린의 ‘쿨투어브라우어라이’, 화물을 나르는 고가 철로에서 선형 공원으로 변신한 뉴욕의 ‘하이라인’은 이미 익숙한 사례다. 국내에서도 선유도공원, 서서울호수공원, 마포문화비축기지 등 유사한 실험이 진행됐고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45년간 와이어로프를 생산했던 부산의 고려제강 수영공장은 ‘F1963’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돼 문화예술 명소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년간 대선제분 인근의 공장들은 전면 철거 후 재개발됐다. 방림방적 공장은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재개발됐고, 경성방직 부지에는 복합쇼핑몰 타임스퀘어가 들어섰다. 오비맥주 공장은 서울시가 과감하게 매입해 녹지 위주의 영등포공원을 조성했지만 과거의 흔적은 거의 대부분 지워졌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장소 고유의 경관은 도시의 역사를 증언한다. 한 세대의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해준다. 무너진 콘크리트와 녹슨 철골에 남겨진 근대사의 경관을 되살려 영등포의 재생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하는 대선제분 프로젝트의 귀추가 주목된다. 밀가루 공장에서 문화 발전소로의 변신에 성공해 도시설계 교과서에 대표 사례로 기록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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