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뭔가를 찾을 게 있어서 딸에게 컴퓨터에서 검색을 해 달랬더니 알았다고 하고는 모니터 화면을 번개같이 훅훅 지나친다. 그 속도에 미처 한 장면도 포착하지 못했다. 다시 제대로 보여 달라고 했더니, 딸은 처음으로 돌아가 화면을 넘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잠깐 천천히 보여주는가 싶더니 화면은 다시 점점 빠르기로 끝이 난다. 확인했냐고 묻는 딸에게 중간부터 못 봤다면서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딸은 한숨을 푹 쉬더니 중간부터 다시 보여준다. 어쩌자고 이번에는 원래 찾던 것은 아니었으되 우연히 포착한 어떤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지목하여 좀 보자 하니 딸은 엄마가 찾던 건 그게 아니라며 화면을 넘기면서 또 다른 검색창을 연다. 나는 결과적으로 헛수고 시킨 것을 들키지 않고 청탁을 중지하려고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방에서 나왔다. 마치 다른 종족이라도 되는 듯이 아들딸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다르다. 우린 한 공간에 있으되 다른 속도의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생각해보니 울 엄마라고 다르지 않았을 테니, 내가 내 딸의 현란한 속도에 주눅이 들듯 울 엄마는 내 속도를 따라오기 어려운 아니꼬운 순간이 참 많았을 게다. 내가 나이 들면서 나의 속도가 느려져 허둥대는 수가 많아졌으니, 엄마가 알면 쌤통이라 하실는지.) 나는 요즘엔 빨리 걸으면서는 생각도 잘 못해서 뭔가를 궁리할 일이 있으면 걷다가 멈추거나 천천히 걷는다. 그럴 때면 걸음이 먼저 가면 생각이 쫓아오지 못하니 자주 멈추어 서야 한다고 했던 인디언 속담을 떠올린다. 어떤 사건을 마주했을 때 그게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데도 요새는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러자니 뭔가 얘기하려고 하면 이미 남들은 그것에 관해 벌써 마구 떠든 뒤이고, 이윽고 내가 말하려면 이미 지나간 얘기고 뒷북이라고 핀잔이다. 숨 한 번 쉬고 ‘이윽고’ 뭔가 하려면 이미 지나쳤다는 말이다. 제 심장 속도에 맞게 사는 일은 어려운가 보다. 워낙은 그게 제 몸에 최적의 것으로 스스로를 평화롭게 만드는 속도였을 텐데 사람들은 그보다 좀더 빠른 속도로 살기를 바란다. 그렇게 허둥대다 보니 마치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가려고 자주 달음질을 치는 아이처럼 내 심장은 속도 조율을 위해 가끔 푸드득거리며 과로하는 듯 보인다. 심장은 느리게 뛰는 게 좋은 거라고, 예전에 신선과 도사들이 양생의 기본으로 실천했던 게 벌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히는 거, 그것이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이미 세상의 빠른 속도 인간들은 느린 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속이 터지고 천불이 난다고 아우성이니 눈치가 보이고 주눅이 들어 억울하다. 누구나 삶을 관통하는 상대속도가 있단다. 한해살이 생명과 십년 사는 생명과 백년, 천년 사는 것이 모두 제각기 한평생을 살고, 그 시간들을 미분하여 보면 한해살이의 하루가 백년 사는 생명의 몇년치가 압축된 것일 수 있다나. 혹시 팔백년 산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 나의 십년이 일년이었는지를 물어서 확인해보겠으나 내가 물을 곳이라곤 천년 산 은행나무, 수억년 된 바위뿐이니, 천번째 떨군 낙엽과 수억년째 맞는 돌서리의 빛나는 아침 햇살 앞에서 너의 속도가 어떠했느냐고 묻고 확인할 길은 없다. 그저 제 시계대로 잘 살아보자 할밖에. 어쨌거나 나는 이 환절기에, 선빵을 날려야 하고 선수를 쳐야 하는 세상의 이 조급함에 대해 느린 속도 사람으로서 볼멘소리를 좀 하고 싶다. 단풍이 지기도 전에 만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리 반갑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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