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은 여성의 운전과 공연 관람 허용, 종교경찰 활동 제한 등 이전 정권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조처를 했다. 김정은은 ‘고난의 행군’ 등 비참했던 시기를 아버지 김정일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개혁·개방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개혁 깃발은 두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
사우디와 북한은 서구가 주도한 근대 속에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여전히 지정학적·이념적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나라다. 빈 살만과 김정은의 성패는 근대라는 동력이 중동과 동북아에서 어떤 식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한 한 모델이 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33) 왕세자와 김정은(34) 북한 국무위원장.
세계 주요국 지도자 가운데 이 두 사람이 앞으로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이어갈 것으로 최근 미국 <블룸버그>는 내다봤다. 십여년 정도가 아니다. 빈 살만은 적어도 2044년부터 반세기까지, 김정은은 30년 이상이다. 쿠데타나 혁명, 전쟁, 질병 등 돌발사태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지금의 정치 상황과 본인의 여건을 고려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두 사람이 한 묶음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지구촌의 난제인 중동·동북아 지역의 지정학적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우선 3대 세습 정치인이다.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빈 살만의 큰할아버지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를 건국하고 1932년부터 21년 동안 왕을 지냈다. 20세기 초중반에 등장한 나라 가운데 북한과 사우디처럼 칠팔십여년 동안 가족이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한 경우는 많지 않다.
김정은은 1984년 1월8일생으로 알려져 있고, 빈 살만은 1년 반 남짓 늦은 1985년 8월31일생이다. 두 사람은 2011년에 정치적으로 비약한다. 빈 살만은 제2 왕위계승자였던 아버지 살만 빈 압둘아지즈(83)가 11월 국방장관이 되자 그의 보좌관으로 권력 핵심에 다가가고,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이 12월 숨지면서 바로 최고권력자가 된다. 압둘아지즈는 제1 왕위계승자가 2012년 6월 고령으로 숨지자 왕세제 겸 제1부총리(총리는 왕이 맡는다)가 된 뒤, 이복형인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이 2015년 1월 역시 고령으로 숨지면서 왕위에 오른다. 빈 살만은 바로 국방장관이 돼 나이 든 아버지를 대신해 실권을 장악한다.
무자비하게 정적을 축출한 과정도 닮았다. 빈 살만은 2015년 7월 왕세자가 된 사촌 형 무함마드 빈 나이프 내무장관을 협박해 2017년 7월 왕세자 자리를 뺏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지난해 부패 척결을 빌미 삼아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왕자들과 전·현직 고위관료 200여명을 구금했고, 최근에는 반정부(반왕정) 활동을 이유로 수천명을 억류했다가 충성서약을 받고 풀어줬다. 김정은 역시 권력 강화를 위해 당·정·군 간부 수백명을 숙청 또는 처형했으며, 그 가운데는 고모부이자 후견인으로 꼽힌 장성택도 들어 있다.
빈 살만은 자신의 행태를 비판해온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지난달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으로 유인해 잔인하게 죽인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된다. 이는 북한 공작원이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을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독물로 암살한 일을 연상시킨다.
■ 두 사람이 개혁 깃발을 들고 젊은층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도 비슷하다. 빈 살만은 여성의 운전과 공연 관람 허용, 종교경찰 활동 제한 등 이전 정권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조처를 했다. 사우디 건국의 한 축이었던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 와하비즘과도 거리를 둔다. 탈석유 경제를 겨냥한 ‘비전 2030’ 역시 그가 주도해 추진하고 있다.
김정은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등 비참했던 시기를 아버지 김정일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개혁·개방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선, 금강산, 개성, 황금평·위화도 등 기존 4대 특구에다 중앙급(5개)·지방급(18개) 경제개발구를 더해 모두 27개의 특수경제지대를 운영 중이다. 그의 집권 동안 장마당이 500개 이상으로 늘어나 시장경제를 주도한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나 장마당을 맛보고 키워나가는 젊은 세대는 김정은 정권의 주요 기반이다.
개혁 깃발은 두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 세계 최대 원유수출국인 사우디는 국내총생산의 40% 이상, 세입의 90% 정도를 석유가 차지해 경제 구조가 취약하다. 중동에서 가장 퇴행적인 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국민의 노동 의욕이 낮고 남녀 차별이 심하다. 북한 또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공식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크다. 혁신 토대가 취약한 경제는 새로운 계기가 절실하다. 활력 있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면 김정은과 빈 살만의 세대에서 나라의 존립조차 위협받을 수 있다.
불확실한 전망은 두 사람이 정치개혁을 삼가고 절대권력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외세·외국풍조의 영향력 강화와 이와 연관된 국내 지지세력 이반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둘은 잘 안다. 지금 사우디에서는 ‘왕족 합의에 따른 주요 사안 결정’이라는 전통이 거의 사라지고 빈 살만이 독주하고 있으며, 북한에서도 민주화의 조짐은 잘 보이지 않는다.
■ 또 하나 닮은 점은 대외관계, 특히 미국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기대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침묵하고 반이란·친이스라엘 노선을 강화하는 등 사우디의 친미 노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분명하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빈 살만이다. 그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센 예멘 내전 개입도 본격화했다. 빈 살만과 미국 사이 핵심 통로는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38) 백악관 선임고문이다. 정통 관료들은 ‘외교의 사유화’에 대한 불만이 있지만 정면 도전을 꺼린다. 미국의 대북 정책 또한 범정부 차원의 면밀한 검토는 생략된 채 트럼프의 의지에 크게 의존한다. 이를 아는 북한도 트럼프의 결단을 끌어내는 데 외교력을 모은다. 김정은과 빈 살만이 트럼프 정권에서 새로운 대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이후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중동과 동북아, 그 속에서 사우디와 북한의 지정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우디는 적어도 한 세대는 석유를 외교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석유대국이다. 어떤 패권국이 등장하더라도 사우디를 적으로 돌리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는 그런 외교 자산이 없다. 핵무기로 자신의 안보를 지킬 수 있을진 몰라도, 국제적 고립과 함께 가는 양날의 칼일 뿐이다.
지역 내 위상도 큰 차이가 난다. 중동에선 여러 지역강국이 공존한다. 어느 한 나라가 주도권을 휘두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어떤 식으로 세력 재편이 되더라도 사우디는 강국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반면 북한은 아무리 허세를 부려봐야 지역강국이 될 수 없다.
지정학적 안정성이라는 면에서는 빈 살만보다 김정은의 운신 폭이 크다. 중동은 근대 이후 외세 개입이 일상화한 지역이다. 지역 내 종파·종족 갈등이 줄어들 전망도 높지 않다. 사우디가 이끄는 범수니파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범시아파가 맞서는 현실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지금의 왕정 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는 한 빈 살만이 다른 노선을 택하기는 쉽지 않다. 동북아는 중동만큼 복잡하지 않다.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의 경쟁이 계속되더라도 모두 덩치가 큰 나라여서 틀을 짜기가 상대적으로 낫다. 북한은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 나가면 된다.
■ 둘의 큰 차이가 또 있다. 앞으로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강력한 협력자의 유무다. 김정은이 비핵화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개혁·개방을 지속한다면 한국에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남북 사이 협력과 통합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중동에서 가장 바람직한 구도는 수니파-시아파 대타협을 바탕으로 한 지역협력 강화다. 2015년 이란핵협정 발효는 그쪽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지만, 사우디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 사우디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지역강국은 사실상 없다. 가까운 곳에서 그런 상대를 찾을 수 없는 한 사우디는 미국을 비롯한 외세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는 거꾸로 지역 갈등을 심화시킨다.
사우디와 북한은 서구가 주도한 근대 속에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여전히 지정학적·이념적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나라다. 억압적 체제의 계승자이자 새 유형의 지도자인 빈 살만과 김정은의 성패는 근대라는 동력이 중동과 동북아에서 어떤 식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한 한 모델이 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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