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27년 전 그의 맑고 앳된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는 듯했다. 그날 이후 그에겐 무언가 부조화스러운 슬픔, 무력감 같은 게 배어 있었다. 1991년 여름 자진 출두하며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애처롭던 눈매는 올가미에 걸린 사슴을 떠올리게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91, 봄>은 강기훈이 겪은 터무니없던 삶의 궤적을 기타 선율에 실어 전한다. 기타 줄을 튕기는 손길이 어딘지 힘에 부쳐 보인다. 함께 연주하는 젊은이들은 그를 “강기타 선생님”이라 부른다. 강기훈 말고 ‘강기타.’ 이른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이젠 ‘김기설 유서 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희대의 사건 피해자인 그는 ‘맨발의 기타리스트’다. 91년 봄 분신한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각본에 휘말려 청춘을 통째로 날린 강기훈은 이제 기타와 카메라를 둘러멘 방랑자다. 묵직한 기타 선율만이 수없이 잠 못 이루고 육신마저 병들게 했을 고통의 세월을 녹여내고 있다. 1987년이 승리의 봄이었다면 1991년은 시련의 봄이었다. 그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전선은 다시 타올랐다. 민중은 87년 6월항쟁의 여세를 몰아 이번엔 군사정권을 끝장내자는 결의로 가득 찼다. 당시 초년병 경찰 출입기자였던 내게 타사 기자들은 ‘혁명이 진짜 일어나는 거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은 퇴조기로 들어섰다. 민중과 군사정권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고, 이 와중에 11명이 분신하거나 공권력에 희생됐다. 군부는 유서 조작 사건으로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총력전을 폈고, 민중은 거기서 패퇴했다. 87년은 모두가 기억했지만, 91년은 애써 잊혔다.
영화 <1991, 봄>에서 강기훈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필앤플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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