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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과학의 세기’와 그 불안

등록 2018-11-01 18:33수정 2019-10-17 16:29

<노동의 종말>이 예측한 대로 지중해와 멕시코 국경에서 ‘풍요의 섬’처럼 폐쇄적인 선진부국을 향해 후진국 노동자들이 ‘난민’이 되어 이주 취업을 위해 벌이는 안타까운 곡경을 보면 ‘부익부 빈익빈’의 세계자본주의 구조적 악화에 과학기술의 책임이 의외로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20년 전쯤의 나는 새로운 세기로 들어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서기 2000년’은 단순히 1999에 그저 숫자 하나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네 개의 숫자가 일시에 바뀌는 것대로의 ‘인류사의 획기’로 생각되었고, 이 연호에 숨은 디지털 세계와 생명공학의 혁신에 아득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생명을 설계하는 의학”과 “물질을 설계하는 공학”은 인간의 역사를 호모 사피엔스에서 메카니쿠스 사피엔스로 재편성할 것이었다. 디지털 세계는 물리적 공간을 재구성하면서 2진법의 심리구조로 아날로그적 사유를 밀쳐낼 것이고, 생명공학은 인간을 피조물의 존재에서 생명의 디자이너로 위상 전환을 이룸으로써 사물계와 생명계의 인식에 전개될 패러다임적 세계 전환을 감당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21세기는 왔고 나도 그 시대로의 편입을 물론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평범한 장삼이사처럼 그 두려운 시대 속에서 어차피 조금씩 적응하게 마련이었고, 조금씩 새 세기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즐기게까지 되었다. 핸드폰을 경멸하던 내게 스마트폰이 이제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못할 신기한 필수품이 되면서 이용은 제대로 못하지만 디지털 기구를 어느 사이 몸 가까이 익혀가게 되었다. 21세기야말로 ‘과학의 세기’임에 이의 없이 동의하면서. 가이아 빈스가 <인류세(人類世)의 모험>으로 지질학 연대를 새로 설정하는 것에 수긍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세기에 여전히 승복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편의적이기에, 너무나 풍요로운 것이기에 오히려 디지털 ‘신’으로서의 새로운 우상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거리며 일어나는 듯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이 정보와 사유의 언어를 종이에 박아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 시대와 세계를 하나의 전망으로 열면서 종교, 과학, 사상, 예술의 ‘혁명’을 불러들였다. 18세기에는 자연의 힘을 인간의 에너지로 전용한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에게 발전과 풍요의 개념을 안겨준다. 그로부터 3세기도 지나지 않아 문자를 디지털 기호로 전환하고 속도와 크기, 범용과 활용을 극도로 증폭하면서, 기계로 제품을 만들던 단계에서 기계가 기계를 발명하는 자기 증식의 새 기술 지평이 열렸고 가상현실을 우리 눈앞에 내보여주었다. 오늘의 이 변혁의 소용돌이에 대해 <생각의 역사>를 추적한 석학 피터 왓슨은 <컨버전스>(집중)의 힘으로 평가하고 이언 골딘과 크리스 쿠타나는 ‘집단적 천재성'으로 이루어질 ‘제2의 르네상스’가 될 <발견의 시대>를 기대한다.

미적분도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 문맹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기사도 이야기만 읽다가 노망 든 돈키호테 같은 짓이지만, <발견의 시대>가 인용한, “인간사를 주의깊게 관찰하면 한 가지 불편함이 해소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불편함이 나타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지적에 동의하며, 과학의 세기에 대한 찬탄 뒤에서 어른거리는 불안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선진국 단계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가장 높고 산아율은 바닥을 헤맨다는 사실이 가장 가난한 나라 부탄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역설과 대조되는 참에, ‘웹 창시자 팀 버너스리의 반성 “구글·페이스북 등 괴물 낳았다”’는 어깃장 기사(<한겨레> 10월2일치)를 읽은 까닭도 덧붙었다.

과학과 기술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붙어다니면서 오늘의 세계는 자연과 인간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구명하는 과학과 거기서 태어나 그 스스로 더 크게 성장한 공학 기술로써 사람들과 사회들에 엄청난 편의와 풍요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과학자의 수가 1980년까지의 세계사에 적힌 과학자들의 총수보다 많아진 이제, 과학연구와 기술 발전은 연필과 종이만 가지고 상대성 이론을 계산한 아인슈타인의 시대와 달리, 집단 연구를 통해, 그것도 국가, 기업, 재단, 대학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이론은 곧장 상품으로 실용화하여 새로운 제품과 수단을 만들어 인간의 부로 축적된다. 나는 이 과학의 실용화 구조에 대해 20여년 전 ‘자본과학복합체’란 이름으로 들여다보았지만, 과학 연구와 신기술 개발의 박력 속에서 ‘혁신’을 외치는 정치인들의 요구대로 ‘일자리 늘리기’가 가능할 것인지, 그 근원적 모순을 해소할 방법이 있을지에 비관적이다.

혁신은 분명 과학기술이 만드는 새로운 발명과 서비스이고 그 목적은 풍요한 삶과 함께 필연적으로 자본의 노동 절약 효과를 증진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발명이 새로운 노동력을 창출한다는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론이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그 효과는 아마 산업시대의 것이고 디지털 융합의 4차 산업혁명기에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뭐라고 말해도 자본의 기대는 이윤의 증가이고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르크스의 논리대로 노동비용의 최소화에 있다. 둘러볼수록, 인간의 풍요는 노동력을 절감한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고 자본-과학 복합체 구조에서 그 실현이 가장 분명하게 보증되었다. 어떻든 기술 발전은 노동비용 절약으로 향한다. 1990년 디트로이트의 3대 기업 시가총액은 360억달러이고 실리콘밸리의 3대 기업 시가총액은 11조달러로 30배가 되지만 그 고용직원 수는 120만명과 15만명의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 과학기술을 업은 자본의 효율성을 노동은 결코 감당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일자리의 증가? 그것은 거의 형용모순으로 보일 정도로 산업과 서비스업의 근본적 재편성 없이 고려되기 어렵다.

디지털 과학은 아날로그 시대의 기계와 달리 그 기술 하나가 또 다른 새 기술을 만들고 범용화하여 새로운 생산과 발명을 이루는 자기 증식 능력을 갖는다. 내가 ‘무어의 법칙’에 따른 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과 인간 사회의 산술급수적 성장 사이의 괴리가 심각한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 ‘기술적 맬서스 비관론’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자본-노동 간의 이 격차는 계층 간의 불평등을 심화할 뿐 아니라 선-후진의 국가적 격차를 더욱 확대한다. 세계의 최하위 국가와 최상위 국가들의 평균 실질소득은 1990년 이래 똑같이 30% 증가했지만 그 실제 금액은 270달러에서 350달러, 3만5천달러에서 4만4천달러로 현금에서 80달러 대 9천달러의 의외로 큰 대조를 보인다. 한 세대 전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 예측한 대로 지중해와 멕시코 국경에서 ‘풍요의 섬’처럼 폐쇄적인 선진부국을 향해 후진국 노동자들이 ‘난민’이 되어 이주 취업을 위해 벌이는 안타까운 곡경을 보면 ‘부익부 빈익빈’의 세계자본주의 구조적 악화에 과학기술의 책임이 의외로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과학으로 성취된 풍요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지 않는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소마’를 배급해주듯이 기술문명과 그 편의들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안락을 쥐여주겠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불행감은 대부분 상대적 불평등에서 일어난다. 게다가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이며 인간의 의미는 과학으로 제대로 포착될 수 없다”는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의 말에서 과학 발전의 오메가가 무엇일까의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과학은 그 출발에서 탈인간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정서는 과학의 공리처럼 순진하지 않다. 더구나 기후 온난화, 자원 소모, 인구 증가, 무엇보다 더욱 심화된 빈부 격차라는, 그 자신 때문에 비롯된 지구적 문제들이 21세기의 뜨거운 감자로 놓여 있다. 이 점에서 과학은 그 자신이 만든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서로 싸우는 정치와 닮았다. 21세기 과학은 어쩌면 ‘초과학적 과학’의 인문학적 지향으로 ‘과학의 세기’를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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