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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마니 풀리테 / 최원형

등록 2018-10-29 17:35수정 2018-10-29 19:19

1984년께 정계 진출 이전 기업가 시절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왼쪽)와 이탈리아 총리였던 사회당 베티노 크락시의 모습. 베를루스코니는 친구 크락시를 뒷배로 삼아 ‘언론 재벌’로 성장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984년께 정계 진출 이전 기업가 시절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왼쪽)와 이탈리아 총리였던 사회당 베티노 크락시의 모습. 베를루스코니는 친구 크락시를 뒷배로 삼아 ‘언론 재벌’로 성장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최근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마지막 소설 <제0호>는 1992년 이탈리아 밀라노를 배경으로 삼는다. <도마니>(내일)라는 신문의 창간 준비호를 만들기 위한 기자들의 첫 편집회의에서 주필인 시메이는 “올해 2월18일의 신문을 만들어보자”며 그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왜 2월18일인가? 그 전날에 “경찰이 밀라노 노인 요양원인 피오 알베르고 트리불치오의 원장이자 사회당 밀라노 지부의 중요 인물이었던 마리오 키에사의 사무실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청소용역 회사가 요양원장에게 건넨 뒷돈이 단지 원장 개인의 비리가 아니라 정당의 불법자금 조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사건은 이탈리아 정치·사회에 만연해온 부정부패를 뿌리뽑는 거대한 문제로 확산됐다. 그 뒤 몇 년 동안 계속된 사정기관의 대대적인 부정부패 수사를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라 부른다. 밀라노의 소장 검사인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가 주도한 ‘마니 풀리테’는 1400명이 넘는 정치인, 기업인, 사업가들을 감방으로 보내며 몇 년 동안 계속됐다. 그 여파는 엄청나서, 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해왔던 기민당과 사회당은 당 자체가 와해됐다. 사회당 대표로서 첫 총리까지 지냈던 베티노 크락시는 300억원의 불법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튀니지로 망명해버렸다.

그렇다면 그 뒤로 이탈리아는 ‘탄젠토폴리’(뇌물 공화국)란 오명을 벗어던지고 좋아졌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마니 풀리테’의 사정 대상이기도 했던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이 뒷돈을 댔던 기득권 세력이 와해되는 와중에도 새로운 기회를 잡아 끝내 ‘마니 풀리테’를 좌절시켰다. ‘포르차 이탈리아’라는 우파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계에 진출한 그는 10년 동안 세 차례나 총리 자리를 차지하는 등 90년대 이후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협잡도 서슴지 않는 언론, 에코의 말을 빌리자면 “진흙 칠 기계 장치”와 같은 언론이 그의 가장 핵심적인 역량이었다. <제0호>는 끝부분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는 영화 대사를 인용하지만, 이미 그 ‘내일’을 경험해본 우리에게 이 대목은 기막힌 역설로 다가온다. 저널리즘을 내팽개친 언론에 포위당하면 ‘내일’은 끝없이 유예될 뿐이다.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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