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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과 국화 / 김종옥

등록 2018-10-26 19:02수정 2018-10-27 15:04

김종옥
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내가 중학생 때 우리 학교에는 애들 가르치는 것보다 국화 키우는 일에 더 열심이신 생물선생님이 있었다. 이맘때면 노을이니 다홍빛 정염이니 하는 이름표가 붙은 갖가지 국화가 교정을 채웠고, 물이 날린 감색 잠바를 입은 선생님이 전지가위를 들고 그 사이에 서 있곤 했다. 선생님의 생물시간은 참 재미가 없어서, 우리는 선생님을 교실에서 보는 것보다는 국화밭 사이에서 보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나직하고 느릿느릿한 말투는, 그보다 두 배쯤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을 가졌던 우리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래 같았다. 그때 우리는 뭔가 수틀리는 게 있으면 집요하게 미움을 쏟아붓곤 하던 악동의 시절이었지만 선생님한테는 그러지 않았었다. 고운 것을 곱게 피워내는 손길이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던 듯싶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국화를 질투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테고.

아무튼 선생님의 수업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이다. 식물의 생장은 가장 적은 양으로 들어 있는 무기성분의 양에 의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이걸 설명하려고 선생님은 높이가 다른 작대기들을 돌려 붙인 물통 그림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긴 작대기들이 둘러싸고 있어도 결국 물통에 담기는 물의 높이는 가장 낮은 작대기가 결정한다. 이 양동이 그림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여러 요소들 가운데 제일 낮은 것이 결정한다니, 얼마나 강렬한 법칙인지!

그 이후로 나는 이따금 무언가를 두서없이 채웠으되 결국 매조지가 허술해서 실실 흘리는 일이 생기면, 으레 낮은 작대기 위로 무언가가 질질 흘러내리는 그림을 연상했다. 그러다 결국 행복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도 그 법칙에 따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 가지 즐겁고 기쁜 일이 있어도 한 가지 아픈 일이 있으면 나의 행복 수준은 딱 그것에 맞춰 형편없이 내려간다. 사회도 마찬가지라, 가장 낮은 작대기의 높이로 그 사회 행복의 총량 수준이 내려간다. 아픈 작대기가 있을 때 평균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발달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부모들은 요새 날마다 가슴속에서 아픈 작대기가 부서져서 행복의 총량이 줄줄 새어나간다. 서울의 한 특수학교에서 장애아이들이 상습적으로 맞고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보도된 이후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사례들이 폭로되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학교라는 곳에서 교육종사자들에 의해 맞고, 질질 끌려가고, 밀쳐지고, 욕설을 듣고, 감금당했다. 자식이 무참히 맞는 장면이 담긴 시시티브이 영상을 보다가 혼절해버린 엄마도 있다. 특수학교뿐이랴. 통합교육을 한다는 일반학교에서는 친구라는 이름의 지옥을 12년이나 버텨야 한다. 특수교육 현장에서 오랜 기간 벌어져온 폭행이 드러나면서 그 원인에 대한 얘기들도 마구 쏟아져 나온다. 진단은 치밀하게 나와야겠지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이 비극 앞에 가해자들도 딱하다. 그들은 어떤 인연으로 사람을 모질게 때리는 비겁한 악다구니를 저지르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 아이들의 어미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알고도 그리했을까.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을 쳤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발버둥 앞에서는 부끄러운 게 아닌가.

올해도 나의 가을은, 사람이 꽃이라 그를 상하게 하지 못한다 하시던 우리 생물선생님의 국화와, 슬픈 작대기가 부러져버려 행복지수가 내려간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을 기억하는 쓸쓸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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