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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모국어를 버리려는 아이에게 / 김지훈

등록 2018-10-21 21:11수정 2018-10-22 14:42

김지훈
책지성팀 기자

이달 초 한강변에서 열린 불꽃축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꽃놀이 시작 시간이 다가오니 한 시간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작은 공간에까지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내 뒤에 있던 한뼘 공간에도 어떤 가족이 다 펴지도 못한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겉보기엔 평범한 이 가족이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은 이유는, 이들이 서로 영어로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큰딸은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는지 발음도 미국 본토식이었고, 초등학교를 막 들어간 것 같은 여동생도 영어를 곧잘 했다. 불꽃이 절정으로 치달아 동생이 “와우 이츠 피날레”(이제 끝난다)라고 탄성을 지르자, 언니가 “노, 노, 피날리”라고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내 발음도 교정해준 효과가 있었다). 엄마도 발음을 들어보니 토종 한국 사람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았다. 터지는 불꽃을 보며 “잇 룩스 라이크 롤리팝”(막대사탕처럼 보인다)이라며 나름의 비유를 사용할 정도로 능숙했다. 크고 아름다운 불꽃이 터지니 “와, 정말 예쁘…”라며 한국어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것을 “…이츠 소 프리티”라며 영어로 황급히 틀어막는 실수도 좀 있었지만. 그중 영어 실력이 제일 떨어지는 건 아빠였다. 승진을 위해 토익 공부 좀 한 정도였을 평범한 아저씨로 보이는 이 아빠는 “옆에 있는 가방을 건네달라”는 간단한 정도의 말뿐,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던지 별말이 없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서로 대화가 다 들릴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불꽃놀이 군중 속에서까지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는 가족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저 부모는 아이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거나, 하다못해 혼낼 때도 영어로 할까? 친가나 외가를 가서 조부모를 만날 때도? 평소 같았으면 귀엽다면서 간식거리라도 집어 줬을 텐데, 이 아이들에겐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가족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 비루한 모국어가 돈 바꿔 먹을 구석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선 영어를 잘하면 굶을 일은 없다’는 세간의 말처럼 영어는 지위를 유지하거나 상승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사실 나도 내 모국어가 영어고, 우리나라 공용어가 영어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아주 가끔 있다. 영어가 모국어라는 건 특권이다. 전세계에서 산출되는 최신 정보들을 가장 빠르게 얻을 수 있고, 가장 풍부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별다른 불편 없이 드나들 수 있는 특권.

하지만 특권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얻기 쉬운가. 언어의 국적을 바꾸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돈만이 아니다. 관계의 수준은 언어의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부모나 자식이 던진 말 한마디가 잊기 힘든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정반대로 다음 세대에도 간직할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섬세하며 정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한 가지 길은 자신의 언어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난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 처지에 별 불만이 없다. 우리의 모국어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삶을 꾸려나가기엔 부족함이 없으니까. 어쨌든 우리에겐 김수영이 있고 백석이 있고 기형도가 있지 않나. 오늘도 수많은 작가가, 번역가가, 학자가, 그리고 언론인이 곡괭이질을 하며 모국어의 지평을 넓히고 그 땅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그 너른 영토를 다 가로지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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