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스위스 방송사 <에스아르에프>(SRF)에서 제작한 철학 애니메이션 ‘필로소픽스’(Filosofix) 유튜브 계정에서 갈무리. 관련 영상 www.youtube.com/watch?v=Br59pD583Io&t=109s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당신은 의식을 잃은 어떤 바이올린 연주자와 병원 침대에 같이 등을 맞대고 누워 있다. 당신을 납치한 ‘음악애호가협회’는 신장 질환으로 죽어가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살리기 위해, 그와 꼭 맞는 유형의 혈액을 소유한 당신을 납치해다가 하나의 관으로 두 사람의 순환계를 연결시켰다. 의사는 이렇게 경고한다. “당신이 이 관을 뽑으면 바이올린 연주자는 죽습니다. 딱 9개월 정도만 이러고 있으면 그의 병이 다 나을 테니, 그때 안전하게 관을 뽑읍시다.” 자,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사고 실험’은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89)이 1971년 발표한 논문 ‘낙태에 대한 옹호’에 나온다. 이전까지 낙태 논쟁은 대체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있다”는 낙태 금지 찬성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논박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톰슨은 이 논문에서 “태아도 사람”이란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주장해, 낙태 논쟁의 지형도를 크게 바꿔놨다.
하나의 관으로 이어진 바이올린 연주자와 ‘나’의 상황은, 당연히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상황을 빗댄 것이다. 내가 관을 뽑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 바이올린 연주자의 생명권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내 신장을 이용할 권리로 이어지는가? 그 기간이 9개월이 아니라 9년, 또는 1시간이라면 어떨까? 납치에 의해 벌어진 상황(강간에 의한 임신)이 문제인가? 한순간의 무지 또는 실수로 인해 빚어진 상황이라면 뭐가 다른가?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주관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이 지난해 11월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려,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해 손팻말을 든 채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톰슨이 던지고자 한 궁극적인 질문은 사실 단순하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바이올린 연주자를 살리기 위해 9개월 동안 관을 뽑지 않고 견디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강제할 수 있느냐다. 임신한 여성을 제외하면, “어떤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타인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기를 도덕적으로 요구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누군가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법의 강제를 받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이다.”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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