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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기억의 전쟁 / 이길보라

등록 2018-10-12 17:17수정 2018-11-02 16:4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총 세번의 상영이 있었다. 감독으로서 일반 관객의 반응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가족들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나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고모는 감옥에 있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태어난 합법적 진보정당을 드나들던 어느 여름이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고모가 잡혀가는 것을 보았다. 입술 대신 손과 표정으로 말하는 농인 부모는 고모가 왜 잡혀가는지 알지 못했다. 고모는 그런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엄마가 되었다. 반에서 1등을 하며 성적 올리기에 급급했던 내게 인도 여행을 권했던 것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의 선택을 지지한 것도 고모였다.

나는 그녀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마주했다. 할머니는 “자식들 중 유일하게 대학 나와 돈 벌고 잘 살 줄 알았더니 학생운동에 빠져 저렇게 힘들게 산다”며 절대 고모처럼 살지 말라고 했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건 고모였다. 나는 그렇게 자라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고모는 지금도 노동당에서 부대표로 일하며 탈핵운동과 기본소득 운동을 하고 있다.

고모는 18살의 딸을 데리고 왔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을 때 나이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고모의 표정은 무거웠다. 참 무겁고 먹먹한 영화라고 했다.

‘나에게 베트남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귀하디귀한 텔레비전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와 같은 나이, 8살이었던 나는 먼 곳에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국방색 캔과 미군 시레이션을 기다리며 동네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카스텔라를 자랑하곤 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베트남 참전으로 우리 집에 일본 산요 선풍기와 텔레비전이 생겼고, 엄마는 행상 대신 수출용 가발 비닐을 벗기는 일을 하며 살림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박정희 신화와 연결되어 점점 나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고, 나는 학살 생존자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얼마 전, 이 영화를 통해 그곳의 시간과 만났다. 나에겐 끊겼던 기억이 그곳에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길고 오래도록 아프고 고통스럽게.’

영화 말미에 민간인 학살로 동생들을 잃은 응우옌럽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말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다 죽었으니까. 누가 그 일들을 책임질 수 있겠어.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책임져야 하나? 젊은 세대는 아무것도 몰라.”

고모는 “대신할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기억’에 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베트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가 가져온 카스텔라를 먹고 자란 고모,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 아직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고모의 18살 딸. 1968년, 베트남 중부에서 있었던 학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답하며 불러내는 사람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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