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만을 위한 맞춤형 지옥 / 이명석

등록 2018-10-05 17:08수정 2018-10-06 19:17

이명석
문화비평가

“너, 그러다 지옥 간다.” 이상하게 삐뚤어진 일을 모아서 할 때가 있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 그랬다. 일단 차례를 지내러 가지 않았으니 조상신을 노하게 했다. 친구들에게 마작이라는 금단의 게임을 가르쳐주고, 패스트푸드를 다량의 포장용기에 담아 와, 감자튀김과 콜라까지 꺼억거리며 먹었다. 금욕과 환경과 건강의 신을 조금씩 건드린 셈이다.

입맛이 까다로운 늙은 고양이에겐 좀더 나쁜 짓을 했다. 먹다 만 사료를 물에 불려 새로 산 습식 사료인 양 속여서 먹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낄낄대다가 케첩을 쏟았는데, 우편물에 붙어 온 선교 전단지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신이시여. 이쯤 되면 나는 어떤 지옥에 떨어질까요?

지옥을 상상하는 건 재미있다. 천국보다 열배쯤.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 <이게 정말 천국일까>에서 아이는 얼마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공책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할아버지가 천국을 상상하며 끄적여놓은 낙서들이 가득하다. 그의 천국엔 곳곳에 침대와 온천이 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의 말을 건넨다. 지겨워지면 환생 코스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작가가 아들에게 책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지옥 편이 재미있었어.” 책 속엔 할아버지가 상상하는 지옥이 아주 짧게 나온다.

철없는 아이만 그런 게 아니다. “디스토피아는 본질적으로 유토피아보다 더 재미있다.” 에스에프(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노웨어(Nowhere)!’라는 에세이에서 말했다. 밀턴이 <실낙원> 1, 2편에서 그린 지옥이 3편의 천국보다 훨씬 재미있단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유토피아적인 요정 나라 로리엔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단다. “하지만 디스토피아적인 모르도르로 다가갈수록 이야기가 얼마나 강렬하고 흥미진진해졌는지 모른다.”

여러 종교가 수천년 동안 지옥 마케팅을 해왔다. 살갗을 벗긴 뒤 용암탕에 던지고, 혀를 뽑아 소로 쟁기질을 하고, 배가 터지도록 음식물을 처넣는다. 이런 지옥은 살벌하기만 할 뿐 지겹다. 이제는 맞춤형 지옥이 필요하다. <이게 정말 천국일까>의 지옥은 귀여운 할아버지의 감성에 딱 맞는다.

지옥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 다리를 비비 꼬고 줄을 서야 한다. 날마다 꾹꾹이 체조를 당해 비명을 지른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착한 이웃이자 기독교 결벽주의자인 플랜더스가 떨어진 지옥도 딱 좋다.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악마로 등장해 가톨릭 성인인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뜨거운 수프에 끓여 먹은 뒤 화살을 뱉어낸다.

내가 이런 맞춤형 지옥에 떨어진다면 어떤 곳일까? 전철 9호선 남성 전용칸으로 매일 출퇴근해야 한다. 찾아가는 카페마다 ‘최신 히트 발라드 20’만 틀어댄다. 하루 세번 국기에 대한 경례, 이틀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리고 고양이가 없다… 그만하자. 역시 지옥은 ‘남의 지옥’, 특히 ‘미운 사람의 지옥’이 제맛이다. 단테도 <신곡>에서 그랬다. 낯익은 정치적 반대파의 망령이 연옥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묘사할 때 최대의 희열을 드러낸다.

어떤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맞춤형 지옥이 가능할 것이다. 값싼 임대주택이 곳곳에 생겨나는 집값뚝뚝지옥, 제자들에게 실없는 성적 농담을 던질 수 없는 교수갑갑지옥, 무지개 깃발을 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남남여여상열지옥, 내다버린 반려동물이 친구 두마리를 데리고 돌아오는 일타삼피지옥… 그 지옥을 뒤집어보라. 그건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누군가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눈앞의 지옥도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우리는 ‘멍청함’과 싸워야 한다 [왜냐면] 1.

우리는 ‘멍청함’과 싸워야 한다 [왜냐면]

윤석열 옹호자들에게 묻는다 [박찬승 칼럼] 2.

윤석열 옹호자들에게 묻는다 [박찬승 칼럼]

[사설]대안은 안 내고 또 트집, ‘제3자 추천 내란 특검’도 못 받겠다는 국힘 3.

[사설]대안은 안 내고 또 트집, ‘제3자 추천 내란 특검’도 못 받겠다는 국힘

[사설] 나라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윤석열 자진출석하라 4.

[사설] 나라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윤석열 자진출석하라

트럼프처럼 복귀하겠다는 윤석열의 망상 5.

트럼프처럼 복귀하겠다는 윤석열의 망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