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지금 세계의 언론들이 한반도 주민 당사자의 입장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매일매일 주요 언론에 발표되는 지성적이고 양심적인 기사, 논평, 칼럼들을 선별해 우선 영어·중국어·일어로 번역하여 인터넷을 통해 체계적으로 끊임없이 국외로 발신하는 공적 기구 하나쯤은 설립·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녹색평론> 발행인 남북 정상이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소하는 장면을 올해 들어 우리는 벌써 세 차례나 보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북녘 동포들 15만명 앞에서 남녘의 대통령이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할 민족공동체”라며 평화공존을 강조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일정이 백두산 천지까지 이어졌고, 거기서 남북의 지도자와 동행자들이 모두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모습까지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그 장면들을 보는 대다수 한국인은―필시 북녘 동포들도―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훤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특히 한반도기를 열렬히 흔들며 환영하는 북의 동포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다가가 몇몇의 손을 잡았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순진한 표정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가슴 한켠에서 순간적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이 통증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삶을 공유해온 사람들끼리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모르고, 65년에 걸친 정전상태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가 없는 외국인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도 국외 언론들의 반응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현격한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남북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 그리하여 양쪽 국방장관이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개시한다는 협약에 서명을 하고, 당장에 휴전선 일대의 지뢰 제거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잠겼다. 그러나 외국, 특히 서방의 언론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는 ‘알맹이 있는’ 조치를 약속하지 않았다면서 이번에도 회담의 성과를 부정하고 한반도에 돌기 시작한 모처럼의 해빙 기류에 찬물을 끼얹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미국의 신문, <시엔엔>이나 <비비시> 등 세계적 방송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통상적인 기업-미디어들과는 달리 비상업적인 경영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중도좌파’ 언론 <가디언>도 예외가 아니었다.(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훨씬 전부터 <가디언>이 발행하는 주간지 <가디언 위클리>의 정기구독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적잖은 비용과 번거로운 송금 절차를 마다 않고 오래전부터 이 신문을 구독해온 것은 약자 무시, 강자 숭배 논리를 당연시하는 ‘사이비’ 언론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때때로 불만스러운 점이 있을지라도, 이만한 정도의 정론지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3차 남북정상회담 직후 <가디언>의 반응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사설을 통해 회담에 대한 거의 직설적인 논평이 개진돼 있었다. 요지는 “말의 잔치일 뿐,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북한이 속임수를 쓰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일본 언론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도 하고 싶지 않다. 한때 일본의 리버럴한 언론의 대명사였던 <아사히신문>을 포함하여 오늘날 일본의 언론은 거의 예외 없이 북조선=악이라는 도식에 갇힌 채 강박적으로 ‘납치자’ 문제를 되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외국의 언론들이 우리의 사정을 몰라준다고 마냥 우리가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지금 세계의 언론들이 한반도 주민 당사자의 입장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노력해본 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서방의 언론인, 정치인, 지식인들이 한반도 사정을 웬만큼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기왕에 누려온 기득권이 있고, 그게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는 이기심이 앞설 것이다. 그들이 한반도 문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궁극적인 원인도 그 점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서방 언론이 한반도 문제를 바라볼 때 거기에는 어떤 선험적인 편견이 강하게 개입돼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주의할 것은, 그러한 선입관과 편견을 강화하는 데 무엇보다 크게 기여하는 것은 한국의 보수 혹은 수구파 언론이 외국어로 제공하는 해외판 온라인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반면에, 현재 한국의 ‘진보파’ 언론에 매일매일 실리는 주요 기사, 논평, 칼럼들은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과 극소수 외국 독자들에 국한되어 유통되고 있다. 우리는 이 현실이 갖는 엄중한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즉, 오늘날 한국어 해독 능력이 없는 외국인이 한국 혹은 한반도 문제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할 때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발행되는 두 개의 영자신문과 그날그날 영어 혹은 일어, 중국어로 소개되는 ‘조중동’ 등 주요 일간지의 일부 논평 및 기사, 그리고 특수 영어방송 채널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 편견일 수 있지만, 외국인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들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보수 내지 수구파에 가까운 (그러니까 대다수 한국인이 보기에는 별로 신용할 수 없는) 사람들로 필진이 구성돼 있기 쉽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들을 수구파라고까지 일컫는 이유는, 그들이 대개 분단체제 덕분에 누려온 자신들의 기득권 내지 이권구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지금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현 정부의 노력을 끊임없이 헐뜯는 그들의 비이성적인 태도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문제는 그와 같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논조를 극소수 전문가를 제외한 외국인들은 마치 한국의 다수 여론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인하기 쉽다는 점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한국 수구파 매체의 일방적인 영향을 받은 외국의 언론인·지식인들이 쓴 글이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이번에는 국내 수구파 언론의 기존 입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활용되기도 하는 끔찍한 현실이다. 흔히 지적되고 있듯이, 현재 북핵문제의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립 과정에서 최대의 난관은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네오콘’, 그리고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숱한 싱크탱크, 정치가, 언론인,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눈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한국 내의 ‘다른’ 의견이나 관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닐까. 한 가지 방법으로, 예를 들어 ‘진보파’ 미디어의 해외판을 확충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현재 <한겨레>는 영문판, 중문판, 일문판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적은 인력으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충분한 자원을 투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물론 이런 빈약한 상황은 무엇보다 돈과 인력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는 개화기 이래 백년도 넘는 세월 동안 외국으로부터 지적, 문화적, 학문적 성과를 오로지 받아들이는 데만 열심이었지, 우리의 입장과 생각을 적극적으로 국외로 발신해보지 못했고, 발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한국문학번역원’이나 학자들에게 영어논문 작성을 권장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한참 늦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라도 매일매일 주요 언론에 발표되는 지성적이고 양심적인 기사, 논평, 칼럼들을 선별해 우선 영어·중국어·일어로 번역하여 인터넷을 통해 체계적으로 끊임없이 국외로 발신하는 공적 기구 하나쯤은 설립·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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