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민주주의의 위기 또는 기회

등록 2018-09-18 17:54수정 2018-09-18 19:18

최근의 위기는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내용의 민주주의를 내세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약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난주 치러진 스웨덴 총선은 이런 면에서 유럽 전체에 경종을 울린다. 극우 스웨덴민주당은 17.6%를 얻어 사실상 연정 구성 협상의 캐스팅 보트(결정권)를 쥐게 됐다.

자유민주주의는 과연 퇴조하는 걸까? 민주주의 확산을 대외 정책의 핵심 기조 가운데 하나로 삼던 미국이 이를 포기한 것을 그 징표로 보는 이들이 적잖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파괴의 주범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큰 물결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옆으로 밀리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섣부르다.

역사는 진보하는 걸까? 진보한다면 그 증거는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지만,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민주주의 발전이 가장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될 법하다. 다수 구성원의 정치 참여와 생활 향상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진보의 동력이기도 하다. 세계사는 이를 뒷받침하는 생생한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지구촌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선진국을 자처해온 서구에서 퇴행 현상이 뚜렷하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에 민주주의 원리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말한다. 여기에는 경제적 평등을 비롯한 공공선을 민주적 방법으로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도 포함된다.

■ 최근의 위기는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내용의 민주주의를 내세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약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난주 치러진 스웨덴 총선은 이런 면에서 유럽 전체에 경종을 울린다. 극우 스웨덴민주당은 17.6%를 얻어 사실상 연정 구성 협상의 캐스팅 보트(결정권)를 쥐게 됐다. 반이주민과 민족주의를 앞세운 신나치 성향의 이 당은 1988년 등장한 뒤 2010년에야 처음 의회 의석을 얻은 신생 정당이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에서 극우 정당이 연정에 진출한 적은 있지만, 가장 개방적인 북유럽에서도 극우파가 득세함으로써 유럽 민주주의는 새로운 고비에 이르렀다.

유럽 극우 정당들은 ‘대중(영합)주의적 종족-민족주의’(populistic ethno-nationalism)를 내세우는 공통점이 있다. 전체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종족·인종의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적 민족주의로 기존 체제를 뒤흔든다. 반이주민·반이슬람, 반유럽연합(EU),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축소 등이 이들의 주요 구호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원리를 부인하는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를 추구한다. 선거는 치르지만 시민을 종족·인종·민족 등에 따라 차별하고 권력 행사의 투명성이 떨어지는 민주주의다. 서구권 바깥의 비자유민주주의로는 터키·러시아 등의 권위적 민주주의가 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영향권 안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서구 극우 정당과 달리 애초부터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체제를 유지해왔다. 비자유민주주의는 저강도민주주의나 유사민주주의로도 불린다.

■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유럽에서 비자유민주주의 전파에 앞장서는 주요 정치인이다. 세차례째 총리직을 맡은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실체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헝가리가 기독교 문화가 강한 중부유럽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다섯가지 권리를 강조한다. 첫째와 둘째는 기독교 문화와 전통적인 가족 모델을 수호할 권리다. 셋째는 나라의 전략적인 경제 부문과 시장을 수호할 권리다. 넷째는 국경을 수호할 권리로, 여기에는 이주민을 거부할 권리가 포함된다. 마지막은 모든 나라가 유럽의 중요한 문제에서 동등한 한표를 행사할 권리다. 그가 겨냥하는 것은 유럽연합이 채택한 가중투표제다.

그는 이런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로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 대륙에서는 지난 100여년 동안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둔 정당과 (좌파) 자유주의 정당이 경합하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 과정에서 교회도 자유주의 원리에 물들었다. 그런데 기독교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 이슬람 이주민이 갈수록 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그래서 기존 민주주의의 대안이 필요한데, 그것이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신정 정치는 아니더라도 기독교 문화에 뿌리를 둔 삶의 양식이 공통의 토대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기독교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거리가 있음을 흔쾌하게 인정한다. 자유민주주의와의 차이는 최근 부각된 세가지 이슈에 대한 입장을 보면 잘 드러난다. 자유민주주의는 다문화주의를 옹호하지만 기독교 민주주의는 기독교 문화를 우선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주민을 포용하지만 기독교 민주주의는 이들을 배척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는 가족 모델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데 비해 기독교 민주주의는 기독교적 가족 모델을 강조한다.

오르반은 서구권 극우 정당들의 주장을 집약하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주도 세력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변하는 미국 백인 민족주의자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최근 유대인 우위를 법률로 보장하는 유대국가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 이스라엘 우파 세력 또한 같은 흐름 속에 있다.

■ 서구권 바깥의 비자유민주주의도 세력을 키우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는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이 이끄는 터키와 이집트가 두드러진다. 이란 또한 선거가 정기적으로 치러지지만 자유민주주의와는 큰 거리가 있다. 이들 나라 모두 권위주의적인 정치 풍토에서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고 자의적인 권력 행사가 이뤄진다. 러시아를 비롯한 체제 전환국과 남미,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도 행태가 닮았으나 민주주의라는 말을 꺼리고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말을 쓰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생활 수준이 높고 자유민주주의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한 정당이 장기 집권하는 싱가포르와 일본을 유사민주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서구권 바깥의 비자유민주주의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제 서구권의 민주주의 약화와 맞물려 상대적으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강한 지도력을 내세워 장기 집권하는 사례가 늘고,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경제협력에 치중하는 ‘중국 모델’이 여러 아프리카 나라들에 인기를 끈다. 비자유민주주의는 과거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처럼 적어도 비서구권에서는 유효성과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족-민족주의 경향도 이들 나라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 자유민주주의는 과연 퇴조하는 걸까? 민주주의 확산을 대외 정책의 핵심 기조 가운데 하나로 삼던 미국이 이를 포기한 것을 그 징표로 보는 이들이 적잖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파괴의 주범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큰 물결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옆으로 밀리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섣부르다. 이와 관련해 세계사에서 나타난 문명 확산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명은 특정한 중심지에서 고도로 발달한 뒤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패턴을 보여왔다. 그런데 중심지의 문명이 쇠퇴하는 동안, 그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주변 지역은 문명의 질을 높이거나 나아가 주변 지역 민족이 기존 문명을 떠맡아 발전시키는 사례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로마 문명 쇠퇴 이후의 서유럽과 만주족이 주도한 청나라가 그랬다. 문명의 하나인 민주주의 역시 이런 양상으로 발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인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지속해서 이뤄지는 나라는 2차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서구 일부 나라에 불과했으나 이제 70개 이상으로 늘었다(EIU의 ‘2017 민주주의 지수’). 인구로 보면 지구촌의 절반 가까이 된다. 지역으로는 6대 주 모두에 걸쳐 있다. 민주주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확산 과정에 있다. 민주주의 지수는 선거 과정과 다원주의, 시민적 자유, 정부의 기능, 정치 참여, 정치 문화 등 다섯가지 범주의 60개 질문에 점수를 매겨 산출한다. 최상위권은 대부분 서구 나라들이 차지했으나 남미의 우루과이(18위)와 우리나라(20위)가 미국·이탈리아(21위)보다 높다. 터키(100위), 이집트(130위), 중국(139위) 등은 훨씬 아래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최선의 형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의 고갱이 가운데 하나다. 일시적으로 약해지는 듯하더라도 역사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1.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2.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장이’와 ‘-쟁이’ [말글살이] 3.

‘-장이’와 ‘-쟁이’ [말글살이]

‘내란 청문회’ 증언, 모두 윤석열을 가리킨다 [1월23일 뉴스뷰리핑] 4.

‘내란 청문회’ 증언, 모두 윤석열을 가리킨다 [1월23일 뉴스뷰리핑]

내란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읽기] 5.

내란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읽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