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실장
중간선거를 두달 앞두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트럼프 행정부의 난맥은 한반도 운명까지 뒤흔들지 모를 시계추와 같다. 백악관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밥 우드워드 저서 <공포―백악관의 트럼프>, 그리고 때맞춰 <뉴욕 타임스>에 실린 익명의 고위관리 편지는 과연 미국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논란을 증폭시켰다. 일련의 폭로가 11월6일 중간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를 더 갉아먹을지, 아니면 ‘탄핵세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달라’는 그의 호소에 보수 유권자들이 응답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상황이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지난주 공개된 워싱턴포스트-에이비시(ABC)방송 공동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자(52%)가 공화당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자(38%)보다 14%포인트 더 많았다. 이는 올해 들어 가장 격차가 벌어진 수치다. 이 추세라면 현재 공화당 우위인 435석의 하원은 민주당 손으로 넘어갈 게 거의 확실하다. 더 눈여겨봐야 할 건, 공화당 우세를 점쳤던 상원 선거마저 점점 박빙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애국적 고위관리’들이 레지스탕스처럼 트럼프의 통치에 저항하고 있다는 <뉴욕 타임스> 투서는, 이 정도로 엉망인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게 타당한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 경제상황에 대한 평가가 좋은데도 현직 대통령 지지율이 42%에 불과한 건 공화당엔 매우 뼈아픈 지점이다. 상하 양원 모두를 민주당에 빼앗기는 순간, 트럼프 정권은 급속한 레임덕에 빠져들 것이다.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닉슨을 하야시킨 <워싱턴포스트> 밥 우드워드 부국장(오른쪽)과 그가 펴낸 신간 <공포-백악관의 트럼프> 표지(왼쪽).
그래서 다음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더욱 중요하다. 11월 미국 중간선거 이전에 북-미 관계가 흔들릴 수 없을 만큼 뚜렷한 진전을 이루는 게 중요한데, 그걸 18~20일 평양 회담에서 가늠해볼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주 평양을 찾은 남한 특사단에 ‘국제사회가 우리의 비핵화 의지를 믿어주지 않아 답답하다’는 식의 토로를 했다고 한다. ‘말’뿐인 미국과 달리,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고 미사일엔진시험장을 폐쇄하는 ‘행동’을 한 북한 처지로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답답함의 토로만으로 대북 불신이 팽배한 미국을 움직일 수는 없다. 미 행정부와 의회엔 ‘불량국가인 북한 지도자를 미국 대통령이 만나준 것 자체가 커다란 양보’라는 시각이 팽배하다고 한다. 그런 미국 태도가 옳은가를 따지기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북한은 9일 성대한 정권수립 70주년(9·9절) 행사에서 무력 대신 경제를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2차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교착상태인 북-미 협상의 돌파구를 열겠다는 적극성이 엿보인다. 그런 의지가 다음주 남북정상회담에선 ‘핵리스트 공개시한 천명’과 같은 분명한 비핵화 행동으로 나타나길 기대한다. 그래야 10월이든 11월이든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올 수 있다. 밥 우드워드의 책 표현을 빌리면, ‘어린애 같지만 그래도 김정은과 남자 대 남자로 마주하고 싶어하는’ 트럼프를 종전선언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
북한의 과감한 행동이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내 이슈 중심인 미국 선거가 북한이란 ‘작은 국제 이슈’에 움직일 거란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다. 미국 국내정치적으로만 보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에게 유리할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북핵 문제 해결’이란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와 김정은이 나란히 서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 또한 만만찮은 탓이다. 진보 성향의 <뉴욕 타임스>가 “트럼프는 푸틴이나 김정은처럼 독재자를 좋아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건 그런 기류의 반영이다.
그래도 김정은 위원장에겐 트럼프를 돕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게 앞으로 두달간의 행보에 걸려 있다. 김 위원장 스스로 말했듯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면, 한반도 평화와 북한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질 첫 단추를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끼우고 가는 게 맞다. 그런 기회는 11월 중간선거가 지나면 선거 결과에 따라 험난한 미로 속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이 행동해야 하는 건 미국의 트럼프를 위해서가 아니다. 북한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란 사실을 깊이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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