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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금, 긋기와 지우기

등록 2018-09-06 17:50수정 2019-10-17 16:30

몽고메리와 치롯 공저의 <현대의 탄생>은 그 현대화에 반동하는 세력으로 파시즘과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의 과격주의를 지적한다. 소녀 레오니는 성인 세계의 이 같은 경직된 편 가르기에 오염되지 않고 더 넓고 크게 새 금을 그어 피부색 다른 원주민과 원숭이까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 이 어린이는 다름이 틀림과 다르다는 순정한 생각으로 살아 있는 타자들을 하나로 묶어 ‘포용의 논리’로 싸안는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백수린의 단편소설 ‘여름의 빌라’는 30대의 한국인 학자 아내가 은퇴한 독일인 학자 부인에게, 그러니까 사회적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노부부에게 학위를 갖고도 여전히 임용되지 못해 피곤한 나날을 치러야 하는 대학 강사 아내가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다. 잔잔한 슬픔과 분노를 아픈 마음으로 풀고 있는 이 ‘문지문학상’ 수상작은 다시 읽는데도 여전히 내게 긴 울림을 주는 대목이 작품의 마지막에 나온다.

우연히 만나 깊이 사귀게 된 두 부부가 캄보디아 휴양지에서 며칠을 함께 지내는 어느 날, 해먹에서 낮잠을 자다 깬 화자는 독일인 손녀가 자기들 주변을 ‘자기 집’이라고 돌로 금을 긋는 것을 본다. 베를린 테러로 엄마를 잃어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어린 레오니는 원숭이와 어울려 있던 그곳 원주민 아이가 다가와 금 밖에 서 있는 걸 보자 문득 일어나 자기와 그 소년 사이에 그었던 금을 지우고는 소년 뒤쪽으로 다시 새롭게 선을 긋고 “집에 새 친구가 왔으니 더 좋아하겠지?”라며 반가워한다. 손가락을 쫙 펴 열 밤 자고 나면 엄마가 돌아온다고 믿는 어린 레오니가 낯선 원주민 아이를 ‘우리’의 금 안으로 끌어들인 감동적인 장면은 나에게 몇 가지 지난 일을 회상시켰다.

20여년 전 케냐의 해변도시 몸바사에서 바다가 한없이 펼쳐져 보이는 호텔 모래밭의 긴 의자에 누워 호사를 즐기던 참에 눈에 들어온 것이 그 나라 원주민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동냥을 바라며 우리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그 남쪽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떠올렸다.

그 몇 해 전, 해체되기 직전의 소련 모스크바에 갔을 때 한국학 교수 마주르 선생을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나는 연락을 받고 호텔 문밖으로 나가 그분을 모시고 들어와야 했다. 소련의 대학교수도 투숙객의 안내를 받아야 호텔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당당한 공산주의 국가의 당당한 학자도 경계선을 맘대로 못 넘는 공산당의 역설을 생각했다. 그 비슷한 기억은 더 멀지도 않게 바로 내 생애 속으로도 번져갔다. 해방되면서 초등생 시절의 ‘친일파’, 중학생 시절의 ‘빨갱이’, 사회생활 이후의 ‘일부 불순 지식인’, 80년대의 ‘운동권’ 그리고 근래의 ‘블랙리스트’ 등 시대는 끊임없는 금 긋기의 연속이었다.

우리와 다른 것들을 금 밖으로 쫓아내기는 아마 인류가 고집한 불평등과 배제의 또 다른 역사적 측면이리라. 국가는 통치자와 귀족, 평민, 노예로 금을 그었고 종교는 불신자와 이교도, 이단으로 찢어 전쟁을 일으키고 파문하며 제거했다. 경제적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갈라 착취와 저항으로 대결시켰고 독재권력은 그 비판자들을 반동과 역적으로 잡아들이고 자유로운 현대 학문조차 찰스 퍼시 스노의 <두 문화>에서 보듯 과학과 인문학의 상호 무지로 배척한다.

이 금 긋기와 몰아내기가 배제의 논리다. 몸 안의 병통을 수술 가위로 절제하듯, 우리 안의 불순한 것들을 잘라내는 배제는 정의, 도덕, 정통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16세기 적어도 8천명 이상의 생명을 화형한 서구의 마녀사냥은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1970년대 숱한 열정과 정의감은 ‘유신’의 명분으로 수배, 고문, 수감으로 고통당했다. 이제도 애국, 이념, 혹은 도덕을 앞세워 매국, 반동, 괴물로 금 긋고 매장하며 혹은 뛰어난 성취들을 잘라내고 있다.

몽고메리와 치롯 공저의 <현대의 탄생>은 그 현대화에 반동하는 세력으로 파시즘과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의 과격주의를 지적한다. 소녀 레오니는 성인 세계의 이 같은 경직된 편 가르기에 오염되지 않고 더 넓고 크게 새 금을 그어 피부색 다른 원주민과 원숭이까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 이 어린이는 다름이 틀림과 다르다는 순정한 생각으로 살아 있는 타자들을 하나로 묶어 ‘포용의 논리’로 싸안는다.

나는 한 세대 전 민중문학론이 팽배할 때 <문학과 민중>이란 글을 보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그 글의 필자는 우리 문학에서 ‘민중적’ 작가 작품들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그들 속에 담긴 ‘비민중적’ 요소를 지적하여 제외시키고 있었다. 가령 김수영의 시에서 자유에의 열망과 혁명에의 기대를 평가하면서도 도시적이고 소시민적이기에 제외되어야 하고, 신동엽은 총체적 시대사적 전망을 보이고 있음에도 그의 소박함, 감상성 때문에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 글을 보며, 나라면 하고 아쉬워한 것은 그 논리를 뒤집어, 김수영은 도시적 소시민적임에도 그의 자유에의 열망과 혁명에의 기대를 끌어안아 민중문학의 정열을 북돋았고 신동엽은 소박함, 감상성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시대적 전망을 보임으로써 민중시학의 가능성을 확대했다는 해석으로 민중문학의 맥락 안에 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뒤집어 금을 새로 그어보면 민중문학의 외연은 넓어지고 내포는 다양해질 것이다.

논리의 정예화는 시각의 투명성을 겨냥하고 있지만, 자기가 그은 금 밖의 것을 배제함으로써 정작 역사와 실체는 사라지고 새삼 “진정한 민중문학은 이제 새롭게 시작할 때다”라고 선언해야 했다. 배제와 포용의 논리가 극명한 세계사적 대조를 보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즈음의 독일과 미국의 경우로서, 우생학적 순혈주의자 히틀러는 인류사에서 유대인을 말살하려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이민들로 건국한 미국은 반유대주의로 쫓겨난 숱한 난민들과 함께 들어온 2천명 이상의 고급한 두뇌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독일의 참담한 패전과 미국의 최강대국 비약이었다.

나는 최근 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김명주 옮김)을 보면서 과학과 이성이 인간의 역사에서 미몽과 부도덕을 지우며 진리와 인식을 확장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셔머는 “수만년 동안의 인류를 묘사하기에 도덕적 퇴보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500년 전에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과학혁명이 이성과 계몽의 시대를 초래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썼다.

과학혁명은 사상혁명과 종교혁명을 통해 이성과 진실로 세계를 새로이 인식하고 무지와 편협의 전근대적 어둠을 밝히며 관용과 이해의 눈을 열어 세상을 자유와 평등의 세계로 진전시켰다. 계몽과 지성, 자유와 인식의 근대적 사유는 인종주의, 국가주의, 이념주의, 계급주의, 몽매주의, 그리고 종교, 윤리, 우생학, 혹은 벌/파/색(閥派色), 성/직/위(性職位)의 별의별 배타적 논리들을 지우고 고쳐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사람들 간 공감의 진화를 추구해왔다. 인간의 역사는 아마도 에고센트리즘에서 벗어나 타자 포용의 인식론적 확산을 향한 느린 진보의 기록이리라.

‘여름의 빌라’에서 레오니가 순진한 마음으로 ‘우리’의 폭을 넓히고 있음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라는 독일 노부인의 편지 구절을 읽어준다.

아마도 ‘자유롭고 평등하고 아름다운’이란 수식어로 받쳐주어야 할 그 ‘인간적 삶’이란 금기와 무지, 몽매와 편협이 빚는 ‘배제의 논리’로부터 이해와 관용, 연대와 제휴의 ‘포용의 논리’로 살 만한 세상을 향해 진화한 모습을 가리킬 것이다. 이럴 때에야 과학의 발전은 그 진의를 얻을 것이고 인간은 이성의 정당성을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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