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무엇을 겨냥하는 걸까? 우선 상대국의 경제위기다. 그리고 무조건 항복이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함께 미국 패권의 한 축을 이루는 ‘달러 패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지금 그 칼끝은 두 나라뿐만 아니라 이란·베네수엘라·니카라과·러시아 등 지구촌의 다수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으로 향한다.
지금 트럼프의 미국은 공동전선을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동의 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터키 등 한두 나라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과거처럼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신자유주의적 관리를 매개로 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라는 공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중국이 아주 짧은 시일 안에 우리보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더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공개적으로 한 말이다. 아무리 무역전쟁 상대라고 하더라도 너무 심하다. 다른 나라의 성장률을 강제로 떨어뜨리겠다는 위협이니 말이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 대표, 아서 래퍼 대통령 고문 등도 ‘중국 경제에 먹구름이 짙어졌다’거나 ‘중국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중국을 붕괴시키는 게 미국의 목표라는 뜻이다. 트럼프는 중국이 공을 들이는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에 대해서도 “세계 무역을 방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욕적이다”라고 했다.
트럼프가 중국 못잖게 공격하는 나라가 또 있다. 오랜 동맹국이지만 최근 여러 사안에서 틀어진 터키다. 그는 터키산 알루미늄과 철강에 20%와 50%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터키 리라화의 가치가 미국 달러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조롱했다.
트럼프는 무엇을 겨냥하는 걸까? 우선 상대국의 경제위기다. 그리고 무조건 항복이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함께 미국 패권의 한 축을 이루는 ‘달러 패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지금 그 칼끝은 두 나라뿐만 아니라 이란·베네수엘라·니카라과·러시아 등 지구촌의 다수 개발도상국(개도국)과 신흥국으로 향한다.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71년 달러와 금의 교환 중지를 선언한 닉슨쇼크 이후 세계 금융시장은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한다. 금융시장의 가변성이 심해지면서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력과 미국 국내 정책이 세계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더 커진다. 이때부터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금리를 연속해서 올릴 때마다 개도국·신흥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1980년대 초반의 집중적인 금리 인상은 1982년부터 중남미를 휩쓴 금융위기를 낳고, 80년대 중·후반의 금리 인상은 89년 대만의 자산 거품 붕괴로 이어진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미국의 고금리 시기에는 멕시코(1994년), 아시아(1997년), 러시아(1998년), 브라질(1999년), 아르헨티나(2001년)에서 금융위기가 잇달아 발생한다.
연준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5.25%이던 기준금리를 0.25%까지 급격히 낮춘다. 이에 더해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으로 3조5천억달러의 새로운 돈을 푼다. 그 가운데 큰 몫이 터키·브라질·아르헨티나·인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신흥국으로 흘러들어간 상태다.
연준은 이제 금리를 올리고 있다. 2015년 12월부터 7차례 되풀이돼 이제 2%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최근 ‘점진적인 금리 인상’ 입장을 밝혔지만, 올 연말까지 2차례 더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있다. 이전 사례들을 살펴보면, 개도국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연준은 13~17회 금리를 인상했다. 적잖은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 상황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나 1929년 대공황 직전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런 때에 트럼프 정부가 취약한 나라에 위협적인 신호를 보낼 경우 그 자체가 방아쇠가 될 수 있다.
■ 경제위기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어느 나라든 값싼 돈이 많으면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만, 투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자산 인플레가 생기기가 쉽다. 이때는 무역적자가 늘더라도 쉽게 돈을 끌어올 수 있어 큰 문제가 안 된다. 미국이 금리를 올려 달러가 빠져나가면 상황이 급변한다. 외화 부족에서 시작된 위기가 자산 거품을 붕괴시키고 실물경제를 불황에 빠뜨린다. 1997년 우리가 겪은 일이다.
경제위기의 일차적인 책임은 그 나라에 있다. 취약한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무리하게 확장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 금융자본과 다국적 기업은 위기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경우가 적잖다. 이들은 위기 발생국의 알짜 자산을 싼값으로 챙기고 경제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키울 수 있다. 우리나라도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외세 의존 구조가 심화했다.
미국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개도국과 신흥국의 경제위기를 제물로 삼아 발전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경제위기에는 패권국의 입김이 작용한다. 계획적으로 위기를 유발하지는 않았더라도 위기의 질과 내용에 영향을 미치고 최대한 이익을 꾀한다. 트럼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위기 대상국을 지목하고 위기를 부추기는 모습을 보인다.
지구촌 경제 전문가 가운데 트럼프가 밀어붙이는 고율의 관세가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은 대부분 무역전쟁이 계속되면 미국의 경제 성장이 서서히 둔화하고 소비자 물가가 올라갈 것으로 내다본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무역전쟁에 매달리는 이유는 지지층 결집이라는 국내 정치적 이유 외에, 상대국의 항복을 받아내 패권국으로서 지배력을 키우는 데 있다.
■ 미국이 달러 패권을 본격적으로 무기로 활용할 경우 상대국은 결국 굴복하고 마는 것이 이제까지의 경험이다. 힘이 약한 개도국·신흥국은 제외하더라도 1980년대에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일본이 그랬고, 최근 유럽 나라들도 트럼프가 무역전쟁을 시도하자 정면충돌을 피하고 타협을 선택했다. 당시 일본은 그 후유증으로 자산 거품이 부풀어 올라 폭발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을 겪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조차 미국보다는 유럽과 중동 등이 더 큰 피해를 봤다. 세계 경제가 동시에 위기에 빠지자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달러의 패권은 더 강해졌고,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근 9년 동안 경기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전과 다른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의 상대국이 고분고분하지 않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경제위기 조짐이 있는데도 트럼프의 요구에 냉담하다. ‘새로운 동맹을 찾아보겠다’는 그의 말에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미국 대신 중국·러시아 등과 손잡겠다는 얘기다. 중국 또한 트럼프의 무역전쟁 도발에 정면으로 맞선다. 중국 처지에서는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게 낫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트럼프의 압박 수준에 맞춰 굴복할 수는 없다. 수십년 동안 이어진 상승세가 꺾여버리면 모든 국내외 정책이 엉클어진다. 중국으로선 1980년대 일본 이상의 실탄(외환과 무역경쟁력)과 내수시장도 있다.
트럼프가 거의 모든 신흥국·개도국은 물론 유럽연합(EU)과 캐나다·일본 등 선진국까지 적으로 삼는 것도 과거 양상과 큰 차이가 있다. 미국이 한 나라만을 겨냥해 명분을 확보하고 국제적 공동전선을 편다면 견딜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없다. 거꾸로 지금 트럼프의 미국은 공동전선을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동의 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터키 등 한두 나라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과거처럼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신자유주의적 관리를 매개로 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라는 공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 트럼프는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미국 안팎의 글로벌리스트(세계주의자)를 거세게 공격해왔다. 그런데 그의 지금 행태는 글로벌리스트와 닮았다. 글로벌리스트의 주력은 금융자본과 다국적 기업이다. 이들은 위기를 겪는 개도국·신흥국에 자금이 물려 피해를 보기도 하지만 이익을 챙기는 데도 능숙하다. 트럼프가 경제위기를 패권 강화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면 이들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가 무리하게 벌이는 관세 전쟁과 관련해선 양쪽의 갈등이 이어질 것이다.
관리통화제도 이행과 되풀이되는 개도국·신흥국 경제위기는 모두 달러 패권기에 일어난 일이다. 새 위기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발생할지, 그것이 달러 패권 양상을 어떻게 바꿀지는 날씨 예보처럼 구체적으로 점치기가 쉽지 않다. 위기가 오지 않도록 국제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지 않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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