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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노동자 청년의 안부를 묻다 / 조문영

등록 2018-08-29 18:21수정 2018-08-29 19:30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8월 중순, 신간 <중국 신노동자의 미래>의 저자 뤼투를 만나러 번역자인 정규식 선생 일행과 북경 교외 지역을 찾았다. 중국 빈곤정책 연구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뤼투는 학계에 남는 대신 기층 노동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일하는 삶을 택했다. 작가 위화가 “같은 무대에서 절반은 희극을 공연하고 절반은 비극을 공연하는 이상한 극장”이라 비유한 중국의 거대한 빈부격차는 2억8천만 농민을 도시를 배회하는 품팔이로 만들었다.

농촌에 남겨진 아이들의 잿빛 얼굴을 보고 제 논문이 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회의감에 뤼투는 굽이진 길을 택했다. 노동자들의 삶을 추적하고, 이들을 대화자로 삼아 글을 썼다. 자신의 질문을 어려워하는 노동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조 신분증을 들고 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

뤼투가 몸담고 있는 ‘북경 노동자의 집’은 노동자들이 함께 노래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공동체다. 품팔이 자녀들을 위한 비인가 실험학교가 있고, 노동자 문화를 만들어가는 극장과 공연장이 있고, 노동자들의 삶을 실어나른 박물관이 있다. 2010년 폭스콘 연쇄자살의 생존자인 톈위도 진열품을 보태었다. 하체가 마비된 채 누워 있는 동안 노동자 친구들이 보내준 격려가 위안이 되었다며 감사편지를 부쳤다. 고향에 돌아간 뒤 만들기 시작한 감귤색 슬리퍼가 편지 위에 놓여 있었다.

뤼투의 동네는 편벽한 교외 지역이지만,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카톡과 유사한 위챗 단톡방이 플랫폼 구실을 한다. 그날 밤 우리가 초대받은 단톡방에서는 노동자대학 16기 2조의 수업이 열렸다. 20년 품팔이 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자연농 실험을 하는 중년 남성부터 베이징의 한국인 가정에서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 품팔이 아버지를 둔 법률 전공 대학생까지 9명이 순번을 정해 ‘농촌 신용협동조합’을 주제로 토론을 진행했다. 발표자는 위챗에 음성을 남기고, 뤼투와 나머지 사람들은 문자로 의견을 나눴다.

도시와 농촌을 떠도는 유동성 때문에 조합 설립이 힘들다는 하소연이 오갔다. 찔끔 저축해 찔끔 이자 받는 농민이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은 단결밖에 없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간절한 목소리에 귀도 예민해진 걸까. 아이가 옆에서 칭얼대는 소리, 버스 안의 웅성거림, 병상의 아버지를 간호하는 중 내뱉는 숨죽인 소리에 말문이 트였다.

북경에서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오랜 조사지인 선전 폭스콘 공장지역에 돌아왔다. 폭스콘 숙사가 있는 건물 앞에선 노무파견업체와 직업학교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채용된 젊은 노동자들이 양동이나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중이다. 그 옆 광장에선 지역 커뮤니티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폭스콘 노동자들이 바자회를 열고 있다. 직접 만든 케이크나 후원받은 물품을 판매하고, 밴드 공연을 하고, 주민들의 가전제품을 수리해주고 있다.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센터 봉사자들은 위챗을 통해 만난 노동자대학의 청년들처럼 자본과 착취, 저항을 얘기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공장과 달리) 이름을 불러주고, 가치를 인정하고, 안부를 걱정해주는 동료들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한국의 노동자 청년들에게도 이런 동료 집단이 있을까? 2년 전 구의역 사고부터 최근 택배 물류센터 감전사까지, 그들은 왜 주검이 되어서야 공론장에 초대받을까? 대학생 또는 대졸 취준생이 ‘청년’ 논의를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별반 호명되지 않는 노동자 청년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시각 위챗에서 노동자들과 열심히 토론 중일 뤼투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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