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 교수·아시아문화 연구자 이번 여름 중국에 세 번이나 출장을 다녀왔다. 베이징, 광저우와 홍콩, 우한과 상하이를 다녀왔는데, 우연찮게 화(華)로 시작하는 네 권역 모두, 이른바 화북, 화남, 화중, 화동을 다녀온 셈이 되었다. 저 거대한 나라에 대해 무언가 안다고 나서는 것은 주제넘지만, 여러 번 다닐수록 배후의 이면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찬란한 역사문화유적이나 화려한 쇼핑 거리 등은 ‘한두 번으로 충분’하니 제친다. 나의 ‘여행 꿀팁’ 첫째는 ‘문예청년(文藝靑年)이 가는 곳들’이라는 문구를 인터넷 검색창에 넣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힙스터가 찾는 요즘 핫플레이스’ 정도의 뜻이다. 그러면 서울의 익선동이나 연남동이나 성수동 등에 있는 카페, 바, 레스토랑, 숍 등을 중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도심 허름한 동네의 좁은 골목 안에 숨어 있는 작고, 귀엽고, 안온한 곳들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중국에도 상륙했네’ 등의 시건방진 생각을 하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들과 짧은 글을 올리기 적절하다. 즉 문예청년을 ‘문학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둔한 일이다. 이런 경험마저 ‘반(反)소비주의적 소비주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또 하나의 팁은 ‘저단인구(低端人口)가 사는 곳들’을 검색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돈의동이나 창신동 비슷한 곳을 찾아갈 수 있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지만 전철이나 버스로 1시간 안에 접근할 수 있는 그곳들에 가면 ‘어떻게 이런 건물이 있을 수 있지?’라는 말이 나오는 불법적으로 창의적인 건물들이 도열해 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닌다. 도심의 거대하고 멋진 고층빌딩의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라 ‘혹시 다른 인종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실제로 이들 대부분은 농촌에서 올라와서 정식 거주권이 없는 이른바 민공(民工)들로 식당, 배달, 공장, 상점, 건설이 5대 직종이란다. 이런 현상들은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편이다. 각종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거대도시는 극단적 풍요 이면에 존재하는 극단적 빈곤을 쉽게 감출 수 없다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사실은 그 빈곤으로 인해 그 풍요가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말 베이징에서 ‘저단인구를 추방한다’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반대 여론이나 직접 행동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유심히 관찰하면, 저단인구가 사는 동네 한 귀퉁이에 작은 공간을 열고 그곳의 주민들과 접속하여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외양은 문예청년에 가까워 보이지만,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중산층, 이른바 샤오쯔(小資)가 되려는 지향과 단절한 주체들이다. 한 공간의 이름에 등장하는 상호부조(互助)라는 단어에서 느끼듯 급진적 사상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 공간들의 실명은 생략한다. 나는 이런 곳들에 ‘구경’을 다니는 것을 넘어 두 군데에서는 ‘강연’까지 했다. 이런 순간적 조우가 넓고 깊은 연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만보객 활동가’(fl?neur activist)라는 것도 존재할 수 있을까, ‘뜨거운 관찰과 차가운 참여’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등은 내가 아직 ‘지식인’이기 때문에 하는 자문일 뿐이다. 나는 그저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온갖 편견을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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