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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법원은 ‘자기 사건의 재판관’인가 / 여현호

등록 2018-08-14 18:18수정 2018-08-15 10:03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이유는 알겠는데 수긍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있다. 사법농단 사건에서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을 무더기로 기각하는 법원이 그렇다.

영장기각 사유는 가관이다. 재판거래 문건을 작성한 법원행정처 전직 심의관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상관인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며 기각했다. 그런 지시 관계부터 밝히자는 수사인데도 ‘모르쇠’다. 행정처 자료는 “임의제출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정작 행정처는 제출을 거부한다. 핑계만 주고받는 꼴이다. 법원은 지난달에도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대부분 기각했다. 특히 임 전 차장의 ‘상사’들에 대해선 한사코 ‘안 된다’다.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특별조사단 단장인 안철상 법원행정처장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특별조사단 단장인 안철상 법원행정처장
왜 그러는지는 짐작된다. 책임을 임종헌으로 끊고, 수사가 재판거래 의혹까지 번지지 않도록 막겠다는 것이겠다. 5월 말 대법원 특별조사단의 결론이 바로 이랬다. ‘모든 사태는 임종헌 개인의 과욕에서 비롯됐으며, 재판거래는 없었다’는 특별조사단의 결론은 법원의 마지노선인 듯하다.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재판거래의 정황이 분명해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원은 이 사건의 ‘이해관계자’인가.

법관들이 특별조사단 결론 수준에서 검찰 수사를 최소화해야 법원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자신의 일로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증거가 될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허위로 내놓는 행위, 수사를 방해하는 진술은 공범이라면 할 수 있다. 헌법에는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자기부죄 거부의 특권’이 명시돼 있다. 최근엔 “공범 중 한 사람이 범행에 대해 허위로 진술하고 허위 자료를 제출하는 것은 자신의 범행에 대한 방어권 행사로, 범인도피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하지만 공범도 아니면서 ‘공범 의식’만으로 그런 일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집 인근 공원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파문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집 인근 공원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파문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오래된 대원칙도 있다. 사건 당사자나 이해관계자이면서 동시에 재판관이면 그런 재판은 신뢰를 받을 수 없다. 법관은 사건 당사자와 관련이 있거나, 이해관계가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재판에서 빠져야 한다.

그런 원칙에서 보면, 상고법원 성사나 법관 국외파견 등의 ‘거래’가 오가던 와중에 실제로 거래 내용처럼 재판을 늦추는 등의 ‘공교로운’ 행동을 한 양승태 대법원장 당시의 법원은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이해관계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한둘도 아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재판거래나 사법행정권 남용의 직접 관련자도 아닌 법원이 이번 사태를 ‘자기 일’로 여기고 검찰 수사를 통제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신뢰와 공정의 외관’은 훼손된다. ‘지금의 사법부 대신 특별재판부라도 만들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법원이 자기 사건의 재판관으로 전락했다고 보기 때문이겠다.

이제는 둑이 터진 듯하다. 전·현직 대법관의 재판거래 연루 정황까지 검찰에서 나온 마당이다. 법원도 ‘의제된 사실’을 더는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허구 위에서 법원에 대한 신뢰, 사법부의 재건축이 가능할 순 없다. 지금이라도 판결이나 재판절차가 오염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 재판 오염에 관여된 법관들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옳다. 이해관계자이면서 어떻게 재판관으로 법대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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