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 교수·아시아문화 연구자 몇주 전 중국 광저우에 다녀왔다. 그곳의 ‘잉여스러운’ 청년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에 초대받아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하는 것 없이 함께 있는 것이 운동이다’라고 주장하는 요즘 아시아 청년들이 만든 공간들 가운데 하나다. ‘초급 중국어’ 실력밖에 없어서 강연 제목을 영어로 ‘Urban Commoning’(어번 코머닝)으로 보냈는데, 이때 ‘Commoning’은 ‘공향’(共享)으로 번역되었다. 같이 누리기. 음, ‘공유’보다 훨씬 좋았다! 6년 전에 서울시가 ‘공유도시’를 선언했을 때 나는 그 말의 뜻을 오해했다. 오랫동안 공유라는 단어를 한자로 ‘公有’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공유(公有)란 ‘나라 것’이라는 말이고, 그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공유지라는 말은 사유지라는 말 못지않게 나더러 ‘여기에서 나가라’는 뜻이다. 나가라는 주체가 다를 뿐. 선의로 해석한다면, 서울시가 말하는 공유도시는 ‘도시란 나라가 갖는 것(公有)이 아니라 (시민이) 함께 갖는 것(共有)’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에 근거해서 승용차 공동이용, 공유서가, 공구도서관, 어르신과 대학생의 공동주거 등등 창의적인 정책이 나온 점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의가 없다. 단지, 이때 공유는 ‘나눔’을 뜻하는 영어 단어 ‘sharing’(셰어링)을 옮긴 것이라는 점에는 지금도 이의가 없지 않다. 이유는, ‘한정된 자원이나 공간을 나누어서 사용하고 누린다’는 것은 ‘갖는다’(有)는 말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유행이 몇년 지난 어법을 따라 ‘공유라고 쓰고 나눔이라고 읽는다’는 식의 합의라도 구해야 할 판이다. 아니면 한자의 뜻을 모르게 된 지 오래된 상황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가든가. 그런데 공유경제(sharing economy)가 그 어감처럼 그다지 따뜻하고 아름답지 않다는 점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공유경제의 화신인 우버(uber)가 기사들을 쥐어짜서 착취를 일삼는다든가, 에어비앤비(AirBnB)가 도심 거주지를 상업화해서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을 야기한다는 것은 여러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공유경제라는 게 플랫폼을 만들고 통제하는 자들이 ‘날로 먹는다’는 요지의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라는 담론이 나온 지도 몇년 되었다. 나왔다. 그러니 ‘공유 플랫폼으로 도시를 기획하다’라는 말은 너무나 그럴듯해서 1도 믿기 힘들다. 그래서 지난번 칼럼에서 공(共)을 공(公)으로부터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오늘은 공(共)에서 유(有)를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해본다. 그 유(有)의 대상인 재산, 줄여서 산(産)도 마땅히 떼어내야 한다.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저서 <코먼웰스>(Commonwealth)에서 자본주의는 사(私: the private), 사회주의는 공(公: the public), 공○주의는 공(共: the common)으로 각각 규정했다. ○이라고 글자 하나를 비워둔 이유는 냉전이나 반공 이데올로기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공백을 ‘산’(産)이나 ‘유’(有)라는 욕망 가득한 언어로 채우는 것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共)이란 말은 재산이나 소유를 넘어서는 것, 즉, 공(空)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즉시공(共卽是空)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사족: 중국에서 ‘sharing’은 분향(分享)으로 쓴다. 나눠서 누리기.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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