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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로만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명원

등록 2018-07-27 20:19수정 2018-07-28 15:24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댄 길로이 감독의 <로만 제이 이스라엘, 에스콰이어>를 보았다. 로만(덴절 워싱턴 분)은 대학시절 민권운동에 참가했고 졸업 후에는 그 시절의 동료와 함께 사회정의와 시민권을 수호하기 위한 인권변호에 헌신해왔다. 법정영화에서 변호사라면 거대권력의 음모와 싸우거나 혹은 매수되는 드라마틱한 추리구조와 반전이 주된 내용이 될 것이지만, 이 영화는 사회정의와 생활고의 부조화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로만의 주급은 500달러.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가에서 거주하고 있다. 인권변호에 헌신하다 보니 연애나 결혼은 할 여유가 없다. 사철 낡은 코트를 입고 있으며 자가용도 없다. 식사는 땅콩샌드위치로 일관. 재즈를 듣는 게 유일한 낙이다. 반면, 법률가로서의 로만은 미국 법률의 모순을 예리하게 공박하면서 시민권을 실질적이고 광범위하게 보장할 연방법원 청원을 준비하기 위한 자료수집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장마비로 동업자는 죽고 법률사무소는 대형 로펌에 매각된다. 이로써 로만은 실업자가 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수십년 동안 시민들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법률적 지원을 해왔지만, 로만의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는 인적·사회적 네트워크는 부재한다. 끝없이 이력서를 돌리고 시민단체를 찾아가 자신을 상근변호사로 채용하면 법률지원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이 역시 거부된다. 이 단체의 대표인 마야(카먼 이조고 분)는 여기서 일하는 상근자는 모두 자원봉사자라서 유급 채용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법률사무소를 인수한 대형 로펌의 대표변호사인 조지(콜린 패럴 분)는 한 형사사건을 로만에게 의뢰한다. 로만은 슈퍼마켓 강도살인사건의 피의자를 변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총기살인을 한 또 다른 공범의 소재지를 알게 된다. 피해자와 인척관계에 있는 아르메니아인 협회에서는 범인의 소재지를 제보하면 10만달러의 사례금을 주겠다는 광고를 지역언론에 배포한다. 이를 보고 로만은 ‘비밀엄수의 의무’라는 변호사의 윤리와 양심을 팔면서 범인의 소재지를 알려준 대가로 10만달러를 현금으로 받는다.

다시 마야를 만나서는 “순수한 신념보다는 생활고가 더 절박하다”는 말로 자신의 변화를 정당화한 후, 샌타모니카 해변의 호화 맨션으로 이사를 간다. 근사한 슈트도 두 벌 사 입는다. 일이 잘 풀리는지 대형 로펌의 신사업 부문 팀장으로 임명되면서 과거와는 표면상 완전히 결별한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언제든 회귀하기 마련이다. 대형 로펌의 첫 형사사건 의뢰인은 끔찍하게도 그가 제보한 살인범이었다. 변론을 위해 구치소에서 만난 피의자는 로만을 거세게 몰아붙인다. “네가 한 일을 나는 모두 알고 있다.” 이때 로만의 정신은 사실상 붕괴된다.

로만은 회심한다. 자신이 받은 돈을 되돌려주고, 변호사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경찰에 자수할 것을 결심하며, 그런 자신을 피고로 하는 형사소송 소장을 그 자신이 원고가 되어 작성한다. 영화의 끝에서 로만은 살인범의 또 다른 동료에게 살해당한다. 자기응징의 상징적인 장면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서사의 주인공은 ‘문제적 개인’이다. 그가 속한 사회를 향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그것의 결과로서 극적으로 몰락하고 패배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의 패배와 몰락을 목격하면서 관객들은 충격과 각성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로만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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