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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베네딕트 앤더슨이란 약 / 김지훈

등록 2018-07-22 17:32수정 2018-07-23 12:46

김지훈
책지성팀 기자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연구를 담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는 1983년 출간돼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한국 독자들은 1992년 나남출판사에서 출간된 해적판 <상상의 공동체>로 이 책을 처음 만났다. 1991년에 나온 증보판이 2002년 나남에서 정식 계약을 거쳐 출간됐는데 수년 후에 절판돼, 오랜 기간 독자들이 이 책에 접근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태가 지속돼왔다. 지난달 길 출판사에서 새로 번역해 낸 개정증보판(2006년)을 보면 오랜 절판의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신문과 책 등 출판물을 통해 확대되는 과정에 관심이 많았던 앤더슨은 개정증보판에서 독특한 작업을 진행했다. 자신의 책이 전 세계에서 어떻게 번역됐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앤더슨이 책 말미에 추가한 “여행과 교통: ‘상상된 공동체’의 지리적 전기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에는 번역 출간된 30여개국의 상황이 나와 있는데, 한국이 가장 좋지 않은 사례로 등장한다.

“(…) 나남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더 ‘대중적’인 좌파 성향의 사회과학 서적들을 출간하면서 번창했지만, 그 이후에 시장의 추세가 바뀌자 신자유주의, 보수주의 서적들로 방향을 틀었다. (…) 여러 진지한 작가들과 출판인들에게 나남은 대량생산과 초고속 출간으로, 그리고 어색한 번역과 때때로는 후진 편집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이곳은 여러 저자들에게 고료를 지급하지 않기로도 악명이 높았다. 이제는 보수적으로 바뀐 나남이 새 판을 냈다는 것은 두 시라이시의 일본어 번역본이 거둔 상업적 성공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05년에 서울을 잠시 방문했을 때, 나는 우연히 나남본의 번역자 윤형숙 교수를 만났다. 그는 매력적이고 겸손한 사람이었는데, 해적판의 질에 대해 넘치게 사과하며, 무지막지한 마감에 맞추어 작업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앤더슨이 나남판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으니, 보통 5년마다 돌아오는 재계약에 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조상호 나남출판사 회장에게 연락하니, 안 그래도 앤더슨을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하려 했다고 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명예훼손으로 적어도 8천만원은 손해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다. 하지만 소송비가 2억~3억원이 든다’고 해, 고소를 포기했다. 난 저자들에게 인세를 주지 않은 적이 없다. 세계적 학자란 사람이 한국인 유학생의 확인되지 않은 말을 듣고 엉터리로 써대서 상당히 불쾌했다.”

번역과 편집에 대한 평가는 각각 기준이 다르고, 주관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하기에 옳고 그름으로 결론나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린 2015년 사망한 앤더슨의 지적이 맞다 틀리다를 따지기보단, 한국 출판계 전체의 고질병에 처방한 쓴 약으로 삼으면 어떨까.

번역과 편집의 낮은 완성도는 한국 출판계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다. 2010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올해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김영사) 같은 베스트셀러들이 번역의 문제로 재번역이 이뤄지기도 했다. 학술서 중에서 편집자도 거치지 않은 듯한 모래알 씹는 것 같은 번역에, 교정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낸 책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앤더슨처럼 높은 기준을 가진 고급 독자도 많아지고 있다. 출판계가 자신부터 새롭게 하려는 용씀이 필요하다. 어떤 광고 문구처럼, 안이 새로워졌는데 밖이 그대로일 리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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